아무리 민족성이라는 말이 자칫 무리하게 개인을 일반화하거나 민족 간 차별적인 언어로 들릴 수 있다는 이유로 사용하기가 조심스럽다고는 해도 민족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유명한 자신의 저서에서 ‘린위탕(林語堂)’은 현실주의(R), 이상주의(D), 유머감각(H), 감수성(S)이라는 기준을 이용하여 R3+D2+H2+S1=영국인, R2+D3+H3+S3=프랑스인 등으로 국민성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한민족을 표현하는 국민성에 대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나 일제에 의하여 식민사관을 고착하기 위해 조작된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우리의 국민성에 대한 언급은 대체로 금기에 속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절의 나라’라거나 ‘정이 많은 사람들’ ‘최고로 부지런한 민족’, 특히 각종 지구상의 난공사와 관련해서는 ‘불가능을 모르는 근로자들’이라는 명성을 쌓기도 했던 것이 우리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국민적인 의식과 행동의 경향이, 험난한 민주화의 과정과 경제 성장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오늘에 이르러 대단히 부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것 또한 덮어버리기 만은 어려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1990년대에 박학다식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규태 칼럼’은 ‘빨리빨리병 분석(95.7.5)’과 ‘한국인의 후광(後光)의식(92.7.10)’ 등에서 꼬집었다. 당시에도 끊이지 않았던 대형 인재(人災)사고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위험감각(93.3.30)’이라는 칼럼을 통해 통절하게 경고를 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일각의 지속적인 경고와 채찍질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반성보다는 관성적인 진행을 몇 차례에 걸친 정권의 교체를 통하여 더욱 심화하였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극단적인 편의주의를 보여주는 이중적 가치관과, ‘내가 유리하면 자유, 내가 불리하면 평등’의 기준을 주장하는 무작정의 이기주의, 논리의 정당성 여하에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주장을 거둘 줄 모르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잊은 지 오래된 자기중심주의, 이 모든 결과를 돈과 권력으로 바꾸기 위한 패거리 몰입의 현상이 현재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린위탕의 공식으로 나타낸다면 어떨까. R1+D1+H1+S1=한국인?

이런 배경 속에서 요즘 이 사회 최대 현안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공무원 연금개혁과 ‘무상’으로 표현되는 각종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는 마음이 또 다시 몹시 우울하다. 이 문제들이 과연 이렇게 싸움질의 모습으로 풀거나 풀 수 있는 문제인가부터가 의문이다.

따지고 보자면 모든 수학적인 문제가 더하고 빼기의 변형일 뿐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회계의 문제는 어떠한 어려운 회계의 추정이론과 무한급수나 확률의 계산을 들이댄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돈의 출입이라고 하는 덧셈과 뺄셈의 계산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더욱이 재정회계라고 하는 것은 일부 개인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좌우하여서는 안 되고 객관성과 공개성이 강조되는 특징을 갖는다.

본질적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없는 돈은 쓸 수 없는 것이며 지출을 무리하게 빚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강행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부담을 증가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피할 방법이 없다. 설사 사회적인 합의와 철학이 이러한 부담 배분의 문제에 개입한다고 해도 ‘없는 돈은 쓸 수 없다’라는 원칙을 바꿀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지금 앓고 있는 이 부조리의 중병은, 이러한 대원칙을 무시하고, 아직 충분히 벌어서 쌓아놓지도 못한 속에서 서둘러 남들 사는 흉내 내느라고 빚을 내서까지 지출부터 가늠 없이 늘려온 데에 많은 원인이 있다.

일각에서, 가진 자들이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비록 그러한 주장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재정의 지출은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수입을 확보하고 난 뒤라야 가능하다는 원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순서가 옳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서는 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쪽보다는 돈을 달라거나 지출하자는 쪽에서 먼저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고 회계적인 검증을 받는 것이 옳다. 우겨봤자 지출할 금고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러한 우격다짐이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혁명을 할 것인가? 혁명을 한다면 달라지겠는가?

집단의 힘도 인간적 삶이라는 논쟁도 덧셈과 뺄셈의 원칙을 비켜가지는 못한다. 역사는 늘 그것을 보여주어 왔다. 어쩌다 이 사회는 이렇게 단순한 과학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정말 우리 국민성의 문제인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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