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중에 ‘그악하다’ 또는 ‘그악스럽다’라는 표현이 있다. 실제 사용되는 어감으로는 좀 더 부정적인 경우에 사용되는 것 같지만, 사전적인 의미로는 ① (장난 따위가) 지나치게 심하다 ② 사납고 모질다 ③ 끈질기고 억척스럽다 라고 되어 있다. 어쨌든 점잖은 상황을 묘사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런데 요즘 내게 자꾸 이 언어가 떠오른다. 그악하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악하다. 나 역시, 문제를 삼고 있지는 않지만 아파트마다 벌어지는 층간 소음의 분쟁에서 자유롭지 않고, 자동차를 몰고 길거리로 나서는 순간 곧바로 전장(戰場)에 돌입한 것을 실감한다.

우리의 직장들은 대개 다른 방법만 있다면 언제라도 그만 두고 싶은 피곤한 곳들이고,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치고 이 장사 안하고도 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돈만 좀 쌓인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를 만나기 어렵다.

국회나 광화문 광장은 이제 범국가적인 싸움의 장소로 자리를 굳힌 것 같고, 심지어 휴식을 위해 찾는 소위 휴양지들은 온갖 예측하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다. 미래를 배우는 학교가 온통 그악스러움의 대표적인 장소로 변해 버렸는가 싶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병영은 내부적인 전쟁을 감당하지 못해서 법석이다.

이제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욕지거리를 모르면 정치를 할 수 없고 연예인들은 상말과 독설을 서슴지 않고 튀어 오르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제 이 나라의 국민들은 슬픔도, 즐거움도 패싸움과 권력 획득의 소재로 삼고, 그악스런 싸움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다.

이제 이 땅에서 깊은 사려와 겸손, 양보와 삼가는 마음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정도를 지나쳐 자칫 ‘루저(loser)’가 되는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분란의 덕으로 권력을 가지며 이익을 얻는 세력이 창궐한다. 많은 시민들이 능력만 된다면 자신이 사는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 하고 많은 국민들이 나라를 벗어나기를 꿈꾸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관찰에는 많은 변명과 항변이 있을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고 생존경쟁적인 동물로 이러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성악설적인 설명도 가능하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고유의 역사적인 역정과 경제발전과정의 필연적인 부작용인 것으로 이 사회가 적응하고 변혁해 가는 과도기로 인식하여야 한다는 변명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의 이러한 인식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으로 이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모습이 더 많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항변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러한 설명과 항변들이 모두 사실이기를 바란다. 또한 내가 이 사회의 그악스런 정도를 측정하고 그러한 부정적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각종 매체들이 보여 주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과, 우리를 앞서서 이러한 사정을 경험했던 다른 선행 사회(국가)들의 사례가, 내게 이러한 변명을 수용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이 정도의 국정 장애와 국론의 분열, 논리의 파괴와 저속화, 막무가내의 패싸움, 총체적 아노미(anomie)는 그러한 점잖은 언어들로 덮여질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무엇을 가져오는지는 이미 아르헨티나 등 남미 제국과 필리핀 같은 선행 실패 사례들이 얼마든지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인간의 근본적 성정을 논하거나, 또는 인간이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레 별스런 논리로 밝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인류 역사상 민심이 흉흉하고 분열한 사회가 패망하지 않고 발전한 사례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와 함께 확인하고 싶고, 그러한 분열은 언제나 대중의 착한 마음의 붕괴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과거 왕권시대의 민심의 붕괴는 학정에서 비롯하여 왕과 수령에게 책임이 귀속하였다 하지만, 밥술이나 먹고 살만한 근대 민주사회의 민심의 붕괴는 국민 스스로의 탐욕이 증가하거나 이를 조작하여 자신들의 패거리 이익으로 삼으려는 그악한 세력들에 의해 조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근대국가들의 역사적 사실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들의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유전적 안정화 전략)를 추적하면서 흡혈박쥐의 동족에 대한 헌혈의 사례를 소개한다.

실험을 위하여 고의적으로 굶긴 박쥐를 동족집단이 먹여 살린 사례를 보고하면서 '박쥐 자신에게 피는 단순히 물보다 진하다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 흡혈박쥐는 이기적 유전자에 지배되면서까지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는 자비심 깊은 사상을 전파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마침 버클리의 켈트너 교수는 최근 소개된 저서 ‘선의 탄생’에서 “친절한 사람이 더 쉽게 신뢰와 자원을 얻고 권력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민족이 진실로 집단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모두가 좀 더 착해져야 한다는 데에 의문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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