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이라는 영화가 마침내 ‘아바타’가 가지고 있던 국내의 최대 관객 동원기록을 넘어섰다고 한다.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친절하게 저마다의 해설을 붙여 전해주는 주변의 감상평들과 TV 화면을 통한 광고, 보도매체들의 해설 등으로 벌써 몇 번을 되풀이해 본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다양한 시각으로 다시 검토해 가면서.

우리에게 이순신을 소재로 하는 공연물과 문예작품들은 넘치도록 많다. 초·중등교육을 마친 대한민국 국민치고 ‘백의종군’, ‘필사즉생 필생즉사’,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라는 수사와 문장들이 전하는 감동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누가 울돌목 해전, 한산도 대첩과 노량 해전의 전사들의 위대함과 그 숭고함을 모를 수가 있을 것인가.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한민족의 역사를 대표하는 ‘민족 브랜드’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한민족의 역사가 있을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두 분의 족적은 크다.

그중에서도, 구구절절 지독한 고난과 극복의 행보로 점철하는 이순신 장군의 삶은 뛰어난 소설가가 일부러 감동을 위하여 창작한다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만큼 극적이다. 감히 인간의 삶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감히 우리의 귀감이라고 이야기하기에도 너무 버겁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는 동기와 민심에는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다.

이 땅의 북쪽에서 발간되고 그쪽의 구성원들이 읽고 배우는 역사서인 조선통사 상권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적혀있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때 나라를 지켜 잘 싸웠지만 그는 양반 지주계급이었고 무관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봉건 왕권에 충성하며 양반지주계급을 위하여 싸웠다. 이순신이 그때에 지키려고 한 나라는 진정한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봉건통치배들의 이익을 위한 나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을 비롯한 당시 이름 있는 명장들의 애국심은 계급적 및 시대적 제한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구절을 보면서 문득 일본 수상 아베의 억지와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정치적 사건의 재판정에서 흘러나오는 궤변들이 상기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순신조차 이렇게 매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소위 사상이라는 것이고 신념이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는다.

설마 우리의 주변에 명량을 보고 이 따위 생각을 펼치는 집단들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이와는 또 다른 일부의 감상평들 속에서 이 사회의 부조리를 읽는 마음이 편치 않다.
 
'왜 이런 지도자가 지금은 나오지 않는가'라든지 이 시대의 리더십 부재를 한탄하는 목소리들이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질문과 간구(懇求)들은 일견 시대적인 요구를 대변하는 듯도 하고 양심세력의 절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다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인사들의 칼럼들에서조차 시대적 영웅에 대한 기대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니 이를 문제로 느끼는 내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 시대에 이순신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시대는 지도자를 일꾼이라고 부르고 그 일꾼들은 표(票)가 결정하고 임기에 의해 관리된다. 만일 그렇지 않은 리더십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민주 헌법이 정지된 상태를 가정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변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의 리더십은 밉든 곱든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 뿐이다. 이 시대가 선택한 리더십의 형태는 위인이나 영웅의 것이 아닌 ‘사회적 결정’이라는 모습을 갖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민주적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오늘 우리는 소위 자치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리더십 또한 이 사회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우리의 사회는 이순신이라는 일꾼을 키우고 선발할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이순신 장군의 인간상에 비추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며, 내가 이순신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진심으로 참회할 때라야 이 사회는 비로소 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명량’ 속의 이순신 장군의 혼이 제발 이 시대의 어리석음을 두드려 깨우는 힘으로 되살아나시길 빈다.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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