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물을 두 가지 이상으로 서로 다르게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유능함일까, 무능함일까.

뉴욕의 브로드웨이 어느 옆길의 한 건물 벽에는 물이 반쯤 찬 유리잔의 그림과 함께 '물이 반밖에 안 남은 것일까,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은 것일까'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이 높다랗게 걸려 있다.

무얼 선전하려고 이런 진부한 얘기를 거기에 걸어 놓았는지를 굳이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은 무척 많다.

심리학 서적에 올라 있는 유사한 이야기 몇 편을 더 인용해 보자. '남의 흰 머리는 조기노화의 탓이고, 내 흰 머리는 지적 연륜의 상징이다.' '남이 은둔하면 세상이 그를 버린 것이고, 내가 은둔하면 내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이고, 내가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일한 사물을 서로 대립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귀인(歸因 attribution)의 오류, 또는 태도(attitude)의 문제라고 다루지만, 인간들이 굳이 감정을 담아내려 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이라 하더라도 그 표현 속에는 그들의 감정적 편향이 부지불식간에 녹아있게 마련이다.
 
제아무리 객관을 강조하고 중립적인 점잖음을 견지하는 신사숙녀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그들이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인색하고 편협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검소하고 꼼꼼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지 못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그들의 감정적인 언어생활에서보다 사상적 신념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위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은 삶의 가치를 자유(freedom) 중심으로 보느냐 평등(equality, 때로는 equity)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대립적인 현상이고, 진보와 보수라는 대립 또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주어진 목표 없이 발산(發散)하느냐 필연적인 목표를 향해 수렴(收斂)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편향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범인류적인 현상들이 가지는 가장 명백한 문제는 인간들의 이러한 속성이 항상 ‘참’과는 상관이 없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의 사물을 대할 때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하는 것은 어차피 인간의 자유의사이지만 그러한 의사결정에 따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 인간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앞에 든 몇 사례에서 보듯이 인간들의 이러한 정서적인 표현들은 결국 자신의 편향성 이외에 아무런 객관적인 ‘참’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견 아주 고상하고 심지어 위대하게까지 보이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의 논쟁도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어서 그러한 논쟁의 어느 어간쯤에 ‘참’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인류가 논쟁해 온 주제들 이외에 다른 ‘경우의 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역시 가장 정직한 대답은 그저 “우리는 아직 모른다.”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이러한 무능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누리다 순간에 사라지는 존재로서, 그러한 무능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무능을 소신으로 위장하고 우겨대는 것이 그러한 순간적인 삶의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는 탓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개인적인 사정이 그렇다하더라도 사회적인 문제가 그와 같을 수는 없다. 사회 속에는 많은 인간들의 삶이 통합되어 그 부피와 시간이 개인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확장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객관적인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회가 안전과 지속성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구성원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상대적인 감정과 사상을 함부로 사회화해서는 안 되며 “나는 안다.”라고 무책임하게 함부로 고집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인천의 환경 문제를 비롯하여 월미은하 레일 따위 안전성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들 속에서 이러한 무지와 무책임의 문제를 심각하게 주목한다.

물론 인간이 '완전하게 안다'라는 사실에 도달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필요한 만큼은 알려고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을 공유하려는 합의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당신들은 아직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것을 알 때까지 알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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