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개화 이후에 서구식 교육제도를 도입한 이래 일제를 거치고 또 정부의 수립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이 되는 줄거리는 지도자 양성에 치중한 엘리트 중심의 교육과정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입신양명을 절대시하는 성향의 유교문화 풍토 위에 이러한 지도자 양성중심의 신교육 제도가 출세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인간형성에 기여하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트 중심의 교육체제가 주로 법률가와 행정가나 교직자 의료인과 같은 고위 전문직종의 종사자들을 배출하는 것은 다른 산업 선진국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지만, 혹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는 일, 아니면 궂은 일하는 사람이 보람을 갖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데서 오는 불균형의 문제가 심각한 형편이다.

실례로 우리나라의 정법계 대학의 재학생수는 실제 소요 인원의 100배가 넘는다. 100만 명의 대학생의 3분의 1 이상이라고 말해도 좋다. 비 전공의 법관과 행정관 지망생까지 합치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이 계통으로 진출하려고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서구의 근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한지 1세기를 넘겼는데도 아직까지 의식 수준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2천500여 년 전 중국에서 유교가 성립하던 시기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히 빗나가는 게 아니다.

설사 기술계통이나 그 밖의 실용적인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장년기에 들어서면 전문분야를 팽개치고 관리직이 된다거나,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서 정계에 진출하는 천편일률의 생애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문벌을 중시하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학벌을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느냐는 것보다는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가 여러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분위주의 교육풍토에 대해서는 개화기의 선구자들이 벌써부터 문제가 있다고 보고, 미래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업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었지만, 일제는 한국인에게 고등공업학교의 문호를 활짝 개방하지 않았다.

식민지 치하에서 배출된 한국인 기술자의 우수한 두뇌가, 거물급 독립운동가보다 몇 배로 더 두려웠던 까닭이다. 이런 뜻에서 사실 기술의 자립은 정치적 독립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산업생산기술이 국운을 좌우하는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일제는 한국인이 기술로 자립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영원히 종속화 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그런 원칙 아래 실업교육을 실시했었다.

한국인에게 고급기술을 가르쳐서 자립과 경제부흥의 활로를 열어 주느니 차라리 법관이나 행정가와 같은 고급관료를 양성해서 자기들에게 충성토록 하는 게 낫다는 계산에서 나왔다고 볼 수가 있다.

입신양명의 영달을 해서 장(長)자리에 오르면 여러 사람들을 부리게 되고, 그런 만큼 개인적으로도 성공에 흡족하기 마련이기에 오늘날에도 법관이 되고 행정가가 되고, 모두가 정치가 지망생이 되려 하는 게 현실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이나, 기술자로 입신한 사람조차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우리의 풍토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선망을 받고 남에게 눈에 드러나게 군림하는 듯이 보이는 지도자의 영향력은, 음지에서 아무런 각광을 받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궂은 일만 하는 기술자의 영향력에 비길 때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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