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느끼고 슬픔을 표현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데에도 격이 있다. 슬픔은 인간이 다다르는 최종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원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슬픔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된 것이든 간에 소중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인격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따라 한 개인과 사회의 운명은 그 이후의 진로를 달리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은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의 탄생을 낳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고 아우슈비츠의 슬픔은 오늘의 이스라엘을 만든 원동력이다.

그런가 하면 직업적인 '울음꾼'까지 동원하던 중국 토호들의 초호화판 장례용 슬픔은 시대의 몰락을 불러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에바 페론의 죽음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슬픔은 사회적 분열로 이어져 아르헨티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슬픔이라는 정서가 인간의 인격과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많은 가르침이 있다.

맹자는 그의 제자인 공손추와의 대화에서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非人也: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측은지심 인지단야(惻隱之心仁之端也: 측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인의 시작이다)라고 해서 사람다움을 이루는 인간의 기본적인 네 가지 성정(四端) 중에 그 첫 번째로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천성을 꼽았다.

불가의 자비(慈悲)라는 가르침도 글자의 뜻 자체가 불쌍히 여길 慈, 슬플 悲이거니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 생명가진 모든 것의 한시성과 임시성, 유지(維持)의 아픔에 대한 불가 특유의 슬픔의 인식론으로부터 비롯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슬픔으로 인해 얼굴에는 시름이 드러나겠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바로 잡힌다(전도서 7:3)'라고 인간의 슬픔이 갖는 정화적 기능을 주목하였고,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록 또한 이러한 가르침들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유명한 수필집 <옥중기>에서, '슬픔 뒤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을 뿐이다. 고통은 쾌락과는 달라서 가면을 쓰지 않는다. 슬픔이야말로 인생과 예술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모습이다.'라고 해서 삶에 있어서 슬픔이라고 하는 정서가 갖는 원형질적인 가치를 역설하였다.

물론 이런 가르침들과는 달리 슬픔이 갖는 이중성과 선정성, 그리고 흔히 그 뒤를 따르는 파괴적인 후폭풍을 경계하는 경구들도 무수하다. 논어의 자장편(子張編)에 등장하는 두 구절을 음미해 보자.

'상치호애이지(子游曰 喪致乎哀而止 : 장례는 슬픔을 다하는 데에 그칠 것이다)'와, '인미유자치자야 필야친상호(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 : 자발적 동기만으로 극진함에 이르는 인간은 없다. 굳이 그런 경우가 있다면 부모의 상을 당했을 경우일 것이다)'라는 두 문장은 상을 당한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슬픔의 절제와 한계를 잘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상례의 슬픔은 특정한 의도가 있지 않은 한, 자신의 부모의 경우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그 슬픔은 슬픔의 순수함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슬픔으로 인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다음의 삶이 방향을 잃을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이성적인 경험들은 흔히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현실적 계산 앞에서 무기력하다. 사회적인 슬픔들은 너무도 흔하게 선동의 도구가 되고 살아있는 인간들의 이익과 권력으로 변질한다. 물론 그러한 변질이 항상 부정적인가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는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잔인한 죽음의 명제가 성립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백보 양보한다 해도 오늘 우리의 슬픔은 궤를 잃고 있다. 이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 대선 불복에 이어 붙이고 권력의 반전의 기회로 전환하려는 일각의 시도는 대단히 무책임하고 비열하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불의의 참사를 맞은 학생들과 그 유가족들의 슬픔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이 사회 전반에 대한 반성이 그러한 권력적 동기로부터 시작된다면 그 결과 또한 참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슬픔 한 번을 순수하게 공유해 보지 못하고 분열하는 사회, 그러한 비인격적인 사회를 조장하는 세력들이 있다면 그들이야 말로 이러한 사건을 만들어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진실로 슬픔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격을 전 세계에 보여 주어야 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아이들의 죽음을 거리에 표류하게 하지 말라.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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