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을 뜯어 고쳐 의사운영의 능률화를 기하리라고 한다. (중략)

우리 국회의원들의 타태(惰怠)는 드디어 국회법의 수정까지 불가피하게 되었다. 세비 인상도 자유, 지각의 합리화도 자유, 앞으로는 의원의 사적편의에 따라 외과병원을 (국회에) 부설하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기”까지 할 것이다. 휴회 중이면 차라리 말썽이나 들리지 않지, 개회가 된다하더니 대뜸 국정감사를 하느냐, 이 내무 불신임안을 먼저 하느냐로 세칭 “여야정쟁”이란 것이 벌써 활개를 쳤다.

대국적으로 정쟁을 지양합시다 하던 여당이나, 정쟁을 하게끔 만들어 놓고 따지기는 그만두자는 건 무엇이냐고 하던 야당이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염증이 커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주어야 하겠다.

파쇼라면 모두 상을 찡그리는 세상이지만 파쇼가 독재자의 지배에만 원인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의회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엷어졌던 데도 일인(一因)이 있었던 것을 알아주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60년전 대한민국 국회 모습은…

한 때 명칼럼으로 인기를 누렸던 조선일보의 1956년 11월 10일자 만물상(萬物相)의 일부다. 거의 60년 전의 대한민국 국회는 이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우리 국회의 모습을 소재로 해서 글을 쓴다고 한들 여기서 얼마나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은 정말로 바뀌기 어려운 것인 모양이다.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 모씨를 중심으로한 신당 창당계획이 주목을 받고 있다. 새 정치를 하겠다는 그들을 놓고 이 나라 선배 정당들의 정략적인 계산이 무척이나 복잡하게 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들의 새 정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따위 얘기는 아직 정강정책도 나오기 전이니 벌써부터 입방아를 찧는 것은 일단 삼가기로 하자.

새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세력 한둘인가

다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 나라에 나쁜 정치에 대한 탄핵이 등장한 지는 너무도 오래 되었고 그에 응해서 새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던 정치 세력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이 구호가 등장하는 당위를 한 번쯤 정리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나라에 정변이 있을 때마다,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새 정치와 새 세상을 약속하지 않은 집단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그런데 또 왜? 시중의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정치라는 것을 대체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 공적, 또는 사적으로 권력, 영향력, 권위 등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사고나 행위(1997.진덕규)” 따위로 정리하는 모양이다. 어렵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교과서들이 그 뒤에 부연하는 내용들을 고려해서 “정치란, 복수의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실현하는 과정” 쯤으로 이해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혼자 살아가는 인간을 가정한다면 정치 같은 것이 필요할 까닭이 없고 둘 이상의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의견을 조율하고 실현해 가는 과정 모두가 정치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간 정치의 역사는 아담과 이브 건 나반과 아만이 되었건 최초의 인류로부터 시작된 것이어야 하거니와 이제 새삼 새 정치라는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송구스런 일이다. 굳이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이 조그만 행성 위에 수 만년에 걸쳐 오고 간 헤아리기조차 힘든 수많은 왕조와 권력집단, 패거리들 중에 새 정치 새 세상을 외치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가.

역사에 이름을 올린 인류의 어느 성인, 현철(賢哲)과 명망가(名望家)치고 새 정치의 길을 한 번쯤 밝히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잘난 통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류는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의 탈바꿈을 경험해왔고 신고(辛苦)의 길을 걸어 왔는가.

그럼에도 아직도 인류가 정치의 길을 두고 방황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간단없이 등장하는 탐욕과 독선의 정치 탓이지 노상 헌 정치가 새 정치보다 나쁜 탓은 아니다. 세종의 수백 년 전 헌 정치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신식정치보다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정치란 구성원들 공존의 길 찾는 것

백번을 다시 살핀다 해도 정치는 구성원들의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론을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나쁜 정치는 오직, 나만이 옳고 나만이 가져야 하며 나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독선과 탐욕으로부터 비롯할 뿐이다.

모름지기 바르고 착한 정치(善政)와, 나쁘고 탐학한 정치(惡政)가 있을지언정, 헌 정치 새 정치의 구분이 있을 것인가.

이 땅에 오지 않은 정치는 오직 함께 살고자 하는 바른 정치일 뿐일진대, 남과 합의하는 방법을 모르고 오로지 독선과 탐욕에 젖은 나쁜 사고로 착한 정치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새 정치 논의의 결과가 시거든 떫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인천의 지방정치는 어떤가. 착한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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