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중고등학교와 대학도 인천에서 나왔다. 인하공과대학 시절에 입학해 졸업 후, 여성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 시대는 대기업조차 공과대학을 나온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과 현실이 그만큼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때였다.
 
결국, 우회노선을 택해 교사자격시험을 보고, 중학교 10개월, 고등학교 3년 교사생활을 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천에 돌아와 인하대 교수로서 27년간 재직하고 있지만 본인에게 가장 큰 전환점의 시기는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집은 바로 현재 인하대 후문의 길에 있었다. 그 때 학익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해, 지금의 신흥동 사거리 부근으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가 해장국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인천학익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한글을 못 읽는 바보였다. 반에서도 왕따였다. 학습시간에 공부를 하려고 하면, 옆에 있는 힘 있는 친구가 글도 못 쓰며 아무것도 못하게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 때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 나를 지옥에서 구해준 교육계의 변화가 바로 초등 3학년 때, 주소 지역으로의 전학 조치였다. 학교까지 50분이나 걸려 걸어가야만 했던 나에게 중구 신흥동 신광초등학교로의 전학 조치는 해방이었다.

그 이유로, 첫째는 다른 학교로의 전학은 내가 초등 2학년 때까지 한글을 못 읽은 바보였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전학 온 신광초등학교는 걸어서 15분 걸리다가 4학년 때는 길 건너의 새 건물로 이사했기 때문에 5분이면 학교에 도착하였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보자기에 책을 싸 갖고 50분씩 수인선 철로 길을 걸어야만 했던 학익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했던지…. 셋째는, 4학년이 되면서 반장을 하게 되어 내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상상 못할 바보에서 반장과 전교 어린이 학생회 부회장 등으로의 승승장구하는 내가 생각해도 감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희도 잠깐, 나에게 절망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5학년이었을까? 학교에서 IQ검사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IQ가 99였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사람의 IQ에 대한 학력현황을 적은 통계에 IQ 두 자리 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러한 절망이 어디 있을까? 어머니가 해장국집을 하여 근근이 살아갔지만 그 때 나의 꿈은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공부를 많이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IQ통지를 받은 날, 화가 난 자신을 추스르고자 운동장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중, 담임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려고 불렀는데, 나는 부동의 자세로 그곳에 우뚝 서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마치 선생님이 나의 IQ를 99로 만든 사람처럼.

그 후, 나의 IQ는 중학교 때 138, 고등학교 때 116으로 롤러커스터를 탔다. IQ 138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열망이 만들어낸 인위적 속임수였다. 그 후, 평정을 찾아 나의 진정한 IQ가 얼마일까 테스트한 결과가 고등학교 시절의 IQ 116이었다. 긴 여정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 IQ 99의 절망이 오늘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중고등학교 현장을 찾으면서 교육자의 열정과 학생들의 노력을 당부하는 원동력이다. /최순자 WISET 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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