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를 찾을 때, 주위를 돌아보기 앞서 ‘지난 일’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비춰볼 필요가 있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고 한다.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간난신고를 극복했던 이들이 일단 성공한 후에는 누가 권력자의 오른쪽 도끼가 되고 왼쪽 도끼가 될 것인지 서로 경쟁하기 마련이다. 이때 지도자로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그 누가 ‘결코 발등을 안 찍을 믿는 도끼’인가 하는 점이다.

우선은 능력이 걸출한 의리 있는 돌쇠형일 터다. 허나 그런 인물이 어디 흔한가. 그래서 과거의 행적에 연연하기보다는 해바라기형이라 할지라도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을 택하는 것이 수성에서는 절실하다. 이 점에서 가후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역사가 진수는 그를 평가하여 “권변이 극에 달하다. 그 수준은 장량과 진평에 버금간다”고 했다.

장량과 진평이 누구인가?

일대의 기재였다. 그들은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던 유방을 도와 일약 천하를 장악하게 만든 특급 지략가들이다. 지금도 장자방(장량)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략가로 꼽히며 ‘장자방’이라고 보통명사화 하면 성공을 보장하는 확실한 참모를 상징하지 않는가 말이다. 삼국지 해설가 이탁오도 “가후는 지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었다. 77세까지 살며 최고위직 벼슬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했다.

하지만 가후가 주군(主君)을 모신 모습을 보면 철새형에 가까웠다. 젊은 시절 후한 조정에 출사했는데 독재형 파괴주의자 동탁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 많은 청년과 정직한 관료들이 벼슬을 내놓았으나 그는 계속 동탁의 주변에서 봉사했다. 동탁을 죽인 쾌거로 장안성의 정치적 봄이 왔을 때에도 왕윤이나 사손서 같은 개혁 세력에 동조하지 않고 구동탁군의 잔당 이각과 곽사의 모사로서 장안 공략의 아이디어를 내어 성공시켰다.

가후를 욕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려니와 마땅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아무리 현실이라는 냉엄한 벽 앞에 있을지라도 악당을 위해 선인의 노력을 짓밟는 것은 손가락질 받을 일이고 그래야 한다.

그 후 가후는 현실주의 책사로서 최후의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북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당시 최대의 군벌 원소와 황제를 등에 업은 중소 군벌 조조가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양 진영에서 가후 쪽에 동맹을 제의해 왔다. 사람들은 당연히 세력이 큰 원소와 손을 잡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세력 규모를 보자면 원소가 강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조조의 장남과 장군 전위 등을 죽였어요. 원한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조조와 손잡을 때입니다. 조조가 열세이니 우리를 진정으로 환영할 것이고 또한 조조는 천하를 손에 쥐려는 포부가 큰 만큼 영웅다운 기개로 옛 원한을 따지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가후는 단언했던 것이다.

가후는 조조 진영으로 갔고 여러 차례 공적을 세웠다. 조조 진영에서의 대우도 최고급이 되었다. 허나 가후의 처신은 은인자중. 항상 남보다 뒤에 서고 자식들의 혼인에도 평범한 집안을 사돈으로 삼았다. 아마도 중간에 끼어든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겠고 예전에 조조의 후계자 조앙을 죽인 일이 있기에 자중하려는 보신술(保身術)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자숙했다.

특히 조조의 후계 구도를 놓고 조비와 조식이 대립할 때 중신들이 각각 어느 한쪽의 지원 세력이 되었으나 가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다. 조조는 이런 점이 맘에 들었던지 하루는 후계자 선택의 자문을 그에게 청했다.

“그대가 보기에 비요, 식이요?”

가후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조조가 재차 물었다.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오?”

가후는 그제서야 “잠시 다른 생각이 났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른 생각이라니 뭐요?”

가후는 공손히 “원소와 유표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하하하! 그렇구려.”

조조가 가가대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후의 말뜻은 분명했다.

폐장입유(廢長立幼), 장남을 폐하고 어린 자식을 후계자로 삼았던 원소나 유표 집안이 어떻게 되었느냐, 끝내 패망하고 그 흔적조차 없지 않느냐 하는 의미였다.

가후는 어느 한 쪽을 꼭 짚어서 말하지는 않았으나 ‘과거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요즘 언론에 화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서청원 전 대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박 대통령을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게 했을 때 당 사무총장이 서 전 대표였다거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러브콜을 보냈으나 오로지 친박을 고수하다 영창에 갔다거나 하는 옛 인연부터 시작하여 장차 국회의장, 당 대표, 국무총리 등등 여당 내 세력 개편의 축이 되리라는 전망까지 풍성한 이야기가 넘친다.

권력은 당장에 화려하지만 길게 보면 무상하기도 하다. 아마 이런 이치를 가장 몸서리치게 체험한 사람이 박 대통령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발등 안 찍을 믿는 도끼’가 절실한 나머지 지금의 정치판에 올드 보이들이 계속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자숙하던 가후가 마지막 승부수로 내놓았던 ‘과거의 거울’을 한번쯤은 되새겨보기를…. 차 실장과 김 부장의 알력에서 부친을 잃어야 했던 바로 그 ‘도끼들의 갈등’에 대해서 말이다. /나채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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