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수령은 중앙의 정책을 지방에 집행하는 중앙의 대행인으로서, 지방의 문제를 조절하는 조정자로서, 또한 지방에 필요한 지원을 중앙에 청구하는 지방의 대변인으로서 지방권력의 핵심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지방정치의 바른 운영은 수령에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수령의 선정에 대한 지방민들의 기대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지방 수령의 선정에 대한 기준은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표현된다. ‘수령칠사’는 수령이 지방에서 행해야 할 조규(條規)로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인구를 증가시키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잘 정돈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송사를 공정하게 하고, 간교한 무리들을 없애는 일곱 가지 일이다.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해 ‘수령칠사’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청백·공정한 치민을 실현하여 수령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의미하는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도 다수이다.

선정비는 일반적으로 수령이 교체된 후 그 지방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인천향교의 홍살문 앞에도 인천도호부사(현재의 인천광역시 시장)를 역임한 인물들의 선정비가 있다.

그런데 선정비가 세워진 인물 가운데 대한민국 사람이면 한번 쯤 그 이름을 들어 봄직한 친일파 ‘박제순’이 있다.

박제순(1858~1916)은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대사성·예조참판·인천부사(1888년 5월 부임하여 1890년 9월 10일 교체)·한성부윤 등을 역임한 뒤, 1895년 이후 외부대신·육군참장·의정부찬정 등을 지냈다. 외부대신 재직 중에는 간도행정 관리권 교섭,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는 한편, 1899년 조청통상조약을 비롯한 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박제순은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을사오적(권중현,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의 한 사람으로 규탄 받았다. 그 뒤 1907년 이른바 ‘이완용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내각을 이끌었으며, 1909년 이완용이 저격당한 뒤에는 일시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지냈다.

1910년 8월 29일에는 내부대신으로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강탈당한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여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런데 인천향교 앞에 있던 민족반역자 박제순의 선정비가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2005년 12월 인천광역시 의회보에 ‘친일파 박제순의 善政碑’라는 글을 썼다.

그런데 글이 실리기 전에 몇 몇 신문에 ‘친일파 박제순의 선정비가 인천향교 앞에 서 있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내용이 게재되었고(신문기사의 내용을 보면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치 필자가 이렇게 주장했던 양 보도되었다), 이 때문에 소위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 이를 쟁점화하자 인천시에서는 박제순의 선정비를 뽑아버렸다.

지난 소위 문민정부시절 아무런 역사인식도 없는 사람들이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미명 아래 일제침략기 조선총독부 건물로 사용되었던 ‘중앙청’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역사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비롯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친일파의 거두였던 박제순의 선정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또한 없애버려야 마땅할까.

1534년 미켈란젤로는 새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주문을 받아 가톨릭교회 내부에 ‘최후의 심판’이란 벽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때 미켈란젤로의 생각은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나체가 가장 적합하다”며 등장인물 중 10여 명을 나체로 그려놓았다.

그러나 당시 교황의 권위와 종교관을 고려할 때 교회 안에 이러한 그림을 그린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 이었다.

가톨릭교회는 곧바로 그림의 외설성(?)을 제기했고, 교회의 결정에 따라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 다 볼테라가 주요 부분에 천을 그려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위에 제3자가 무엇인가를 그려놓았다는 사실만 보면 이것은 분명 원작의 훼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우리는 미켈란젤로란 회화가의 정신적인 측면을 분석할 수 있고, 또한 교회가 천을 그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통하여 당시의 시대정신과 종교관을 이해 할 수 있다(김주삼,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 책세상, 2001년 참조).

마찬가지로 박제순의 선정비를 통하여 친일파가 되기 이전 박제순의 활동상을 알 수 있으며, 인천과 도호부사 박제순과의 관계를 추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는 친일파를 설명하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다.

요사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념논쟁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념논쟁에는 반드시 역사가 이용되고 있다.

인천의 경우 ‘맥아더 동상’ 문제가 그렇고, ‘송도’ 명칭 문제 또한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면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이용한 이념논쟁을 탈피해서 역사적 사실을 현재에 접목시켜 발전적인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즉 ‘맥아더 동상’은 한국전쟁과 한미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교육 자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송도 명칭문제를 통하여서는 당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의 실상을 이해하는 방안 등이 그런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역사를 어떤 개인이나 세력의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