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이론적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석학 앤소니 기든스에 의하면, 20세기 포드주의 축적전략에 대한 안티테제를 형성했던 사민주의는 결국 복지병을 야기했고, 작고 강한 국가를 지향하면서 시장의 자율을 극대화하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는 결국 사회적 양극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성장과 균형, 자율과 개입의 경계에서 이제까지 개별국가들의 선택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진단이다.

시장과 사회공동체를 향한 국가의 정책적 판단과 선택이 전적으로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준거를 완전하게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전략적으로 선택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내에서 효율과 형평, 자율과 개입의 문제는 그 어느 하나를 우선시하기 어려운 가치충돌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선호는 종종 그 사회의 역사적 경험에 기인하는 경로의존성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서구와 비서구를 문명적으로 구분했던 ‘근대’, 좌파와 우파를 이념적으로 구분한 ‘냉전’을 거의 동시에 겪으면서 한국사회가 가져온 역사적 인식태도는 하지만 깊은 이념적 성찰이나 경험에 근거하기 보다는 당면하고 있는 현실정치적인 의제들에 대한 추상화된 선호가 여과없이 반영된 측면이 없지 않다.

결국 경험적 실체에 근거하기 보다는 다분히 사회적인 관성으로 고착되어온 이념적 태도로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첨예한 정치적, 정책적 지형과 구도가 형성된다는 것은 다소간에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사회가 압축적인 산업화와 치열한 민주화를 겪고도 여전히 이념적 유연성을 충분히 확보한 채 본질적이거나 구조적인 가치충돌을 회피 혹은 극복할 수 있는 그 충분한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헌법 119조 1항과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2항이 서로 다른 철학적 베이스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헌법조항에 규정되고 있다는 점은 사회학적으로 이러한 우리사회의 역사적 경험과 그 특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기반이 다르고, 법리해석상 상호 모순적일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사회가 추상화된 이념을 떠나 실체화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성장과 분배, 중앙과 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본과 노동 간의 경계를 넘어 효율의 가치와 형평의 가치가 내재적으로 재구조화된 새로운 가치지표를 선택할 수 있다면 경제민주주의의 제도화된 한국적 모델도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본다.

성장과 분배를 놓고 그 어느 하나에 방점을 옮기자는 것이 아니다. 성장과 투자를 촉진하되 공정한 경쟁, 공정한 성과배분이 일어나는 시장을 만들고, 적정한 소득분배 유지를 위한 정책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확대와 성장을 지원하되 사회적 안정성 제고를 위해 중산층을 복원하고 빈곤을 줄일 수 있도록 빈곤감소적 성장을 모색하는 정책적 실천이 필요하다. 규제와 제한을 통해 분배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민경제를 살리고 성장의 온기를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것이 핵심과제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대내외적인 경제외적 변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잠재력을 유지하고, 성장과 형평성을 모두 향상시키며, 불평등과 빈곤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민주화와 사회통합이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이념적 지평에서 갈등하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 공정한 경쟁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고성원  국회 바다와 경제 정책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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