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햇살받은 민중운동 꽃처럼 피다

6월 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민주운동은 큰 폭으로 확대되고 분화되기 시작했다.

7, 8월 ‘노동자대투쟁’은 민주적인 노조 결성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지하 노동운동도 공개 활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고립, 분산됐던 주민운동도 대중조직으로 발전해갔다.

또 한편으로 확대 분화된 운동은 국본(인천본부)에서 전(인)민련 ~ 국민연합(인천본부) ~ 전국(인천)연합 등 전선운동으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였다.

경실련 등 서울에서 출발한 시민단체도 89년 들어 인천에도 조직되기 시작했고, 지역에 대해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

◇ ‘노동자대투쟁’과 민주노조 결성

6월 항쟁과 6.29 선언에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은 7월5일 울산 현대엔진 노조 결성과 법절차를 뛰어넘는 파업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인천에서는 한독금속(7.12), 남일금속(7.13), 서울조구(7.14), 태원(7.16)등이 노조를 결성해 투쟁을 이어가다 8월6일 대우중공업 인천공장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인천 전역으로 확산됐다.

대우자동차가 8월10일 파업에 들어갔고 삼익악기, 코리아스파이서, 경동산업, 영창악기 등이 8월 중순 파업에 들어갔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87년 7월부터 3개월간 인천에서 발생한 파업은 220건으로 파업 참가자수는 10만4천590명에 이르렀다. 이해 6월 107개였던 노동조합은 8월말 204개로 급증했다.

파업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것은 ‘생존권 확보와 노동현장의 민주화’로 집약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자본이 권력과 함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통제해오던 벽을 깨고 생존권을 비롯한 기본권리의 보장을 우선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이와함께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등 대기업 노조를 비롯, 대부분 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건설과 어용노조 개편을 둘러싼 노사분쟁이 뒤이었다.

이를 통해 생산직과 사무직 간 등 작업장 내 차별과 비인간적 대우의 철폐를 비롯한 비민주적 관행, 전근대적 노동 통제의 근절을 요구한 것이다.

이후 이들 노조들은 88년 6월18일 효성동성당에서 27개 노조 5천여 조합원이 참여하는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를 창립했다.

이듬해 가입노조는 81개 까지 늘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은 전국 15개 지역 노조협의회와 전교조, 병원노련 등 5개 업종 조직과 함께 90년 1월 창립됐다.




88년 6월 인노협 결성을 앞두고 노동자들은 인천대 등에서 ‘황재철 의장 및 구속노동자 석방촉구대회’를 잇달아 열었다.

◇ 참교육 운동

6월 항쟁은 학교를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려는 교사들의 의식도 크게 고양시켰다.

이들 교사들은 7월 들어 지역별 대토론회를 통해 교육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비민주적, 관료적 교육행정 개선’, ‘학교예산, 육성회비 사용내역 공개’, ‘비교육적 학교운영 척결’ 등의 요구로 집약하고 기존 대한교련이 아닌 자주적인 교원단체 결성을 상정했다.

이에따라 87년 9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창립됐다.

인천교협은 87년 9월25일, 예정된 주안5동성당이 원천 봉쇄당하자 제2장소인 부천 삼정동성당에서 조용명을 회장으로 창립식을 갖고 ‘인천교사신문’ 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후 89년 5월28일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을 이념으로 전교조가 결성됐다. 인천지부는 6월10일 인천대에서 신맹순을 지부장으로 결성식을 가졌다.

이에대해 정권은 7월1일 전교조 가입자 전원 해임을 발표하고 탈퇴를 강요했다. 이해 9월 전국에서 2천8백여명이 해직, 해임당했다.

89년 11월 까지 인천지부에는 238명의 조합원 중 196명이 해산, 탈퇴하고 39명은 해직됐다.

해직교사들은 94년 들어 다시 교단에 서기 시작했고, 전교조 합법화는 98년 노사정위원회 결의에 따라 99년 1월 국회를 통과해 이뤄졌다.




교육개혁과 전교조 합법화, 해직교사 원직복직을 위한 전국교사대회에 참여한 인천지역 교사들. 해직교사들은 94년 복직됐고 전교조 합법화는 99년 이뤄졌다.

◇ 노동운동단체의 재편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지하 노동운동을 공개적인 활동으로 끌어올렸고 합법적인 정당건설 등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추진을 가능케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6월 항쟁이 한창이던 6월26일 범시민평화대행진이 열리고 있는 부평역 현장에서 창립됐다.

인민노련은 지역 민주노조협의회 건설, 민주노총과 산별조직 건설 등 방향을 제시함으로 노조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내일을 여는 집’ 등을 세워 노조를 공개 지원했다.




인천지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소속 ‘일꾼 노동문제연구실’이 발간한 자료집.

87년 8월에는 소규모 써클들이 협의회를 구성, 각각 활동가들을 파견해 ‘인천지역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를 창립했다.

공실위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상담, 교육활동을 벌여 지역 노조결성과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88년 2월에는 인천부천지역민주노동자회(인부노회)가 창립됐다.

대선을 앞두고 인민노련의 ‘독자후보노선’ 결정에 반대하여 탈퇴한 조직원 일부가 여타 운동가들과 결합해 창립했다.

민주노조 활동을 지원하고 노동법 개정운동, 노동자의 통일운동을 제안, 추동하는 한편 군부독재 반대 투쟁 활동을 벌였다.

87년 6월항쟁 후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특별사면이 이뤄졌다.

당시 인하대를 중심으로 석방 학생 2,30명이 ‘구속청년학생협의회’(구청협)을 결성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88년 8월 50여명의 회원으로 인천민주청년회(후에 인천민주노동자청년회로 개칭)를 창립했다. 이들은 생산직, 사무직등 ‘일하는 청년’ 대상으로 ‘인천 사랑’을 화두로 지역문제, 지역운동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한편 인부노회는 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과 통합했다.

인사연이 92년 해산한 후 인부노회쪽 조직원들은 ‘한겨레노동자회’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인천민주청년노동자회와 통합해 ‘통일로 가는 민주노동자회’(통민노회)를 결성했다. 두 단체는 조직운영과 운동방향을 놓고 대립하여 6개월 후 분리됐다.

88년 5월에는 노동단체들의 상설 협의체로 인민노련, 인부노회, 공실위, 인천산업선교회(일꾼노동문제연구실), 인천가톨릭노동청년회, 한국노동자복지협, 인해협 등이 참여한 ‘인천지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노운협)가 결성돼 집회, 토론 등 교류 협력사업을 벌였다.

이후에도 노조 결성과 운영을 위한 교육과 법적 문제에 대한 상담이 요구되면서 연구단체들이 속속 발족해 89년 3월 인천 노동교육연구소 등 6,7개 단체들이 ‘인천지역노동상담 교육단체협의회’를 결성했다.

◇ 인해협, 인문연, 여노회

87년 7월19일 해고노동자 800여명이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인해협)를 창립, 당시 크게 늘어난 해고자 복직투쟁 지원활동을 벌여나갔다.

인해협은 이미 현장과 공안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해고노동자들로 조직을 구성함으로서 현장 동료 노동자들과 결합, 과감한 지원투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는 87년 7월 창립됐다.

87년 11월에는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인문연)이 창립됐다. 인문연은 지역내 모든 문화단체를 포괄하여 산하 ‘노동자문화상담소’를 통해 노동자의 문화활동을 상담, 지원하고, ‘민족예술연구회’를 통해 전문적인 예술성으로 작품을 생산하며, 진보적인 문화기획 및 공연에 나섰다.

89년 2월에는 7,80년대 동일방직 등 여성중심 사업장의 ‘민주노조’ 출신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인천여성노동자회(여노회)를 창립했다.

블랙리스트나 결혼, 육아 등으로 재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던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힘을 모았다.

여성노동자의 고용안정화와 차별대우철폐, 모성보호 제도화를 통해 정치적, 법적, 경제적 평등을 목표로 했다. 88년 1월 도화동에 ‘일하는 여성 나눔의집’을 개원하고 이를 토대로 여성노동자의 대중조직으로서 여노회를 창립했다.

◇ 천사협과 기사연

88년 10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활동하던 5개 단체(인천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천교구청년회, 도시빈민회 인천지역위원회, 가톨릭 노동사목(부평사목, 부천사목))가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천사협)를 구성했다.

천주교 사회운동의 주체를 보다 명확히 하고 종교부문에서 변혁운동을 일관되게 진행해가기 위함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을 활동 목표로 지향했고 복음의 사회화와 제도교회의 쇄신을 추구했다.

89년 6월에는 인천기독교사회운동연합(기사연)이 결성됐다. 기독청년협의회, 인천지역민중교회협의회,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인천부천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등 기존 4개 단체로 결성됐다.

분산된 각 단체의 역량을 동일한 실천으로 묶어 강화시키고자 했으며, 노동자, 목회자, 청년 학생 등의 대중조직 구성을 촉진시켰다. 노동운동 탄압사례집을 발간하는등 사업장과 결합해 지원활동을 수행했다.

◇ 인사연과 인천민중연합

84년 창립돼 공개적인 인천지역 사회운동을 대표해온 인사연은 87년 말 대선을 앞두고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

인사연이 소속한 민통련이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나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일부가 인사연을 탈퇴했다.

탈퇴한 쪽은 88년 1월 ‘인천우리문화사랑회’와 함께 ‘인천시민공동회’를 창립했다.

인천시민공동회는 87년 9월 결성된 ‘인천지역민주화실천협의회’(민실협)와 통합, 88년 12월 ‘인천민주시민공동회’로 명칭을 정하고 출범했다.

민실협은 6월 항쟁 과정을 거치며 대선을 앞두고 기존 야당이 아닌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던 시민, 학생, 노동자 등 10여명이 모여 결성했다.

‘인천민주시민공동회’는 90년 1월 인천민중연합(민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0년 12월 해산할 때까지 유지했다.

민연은 출범과 함께 ‘민중생존권대책위’를 구성하고 세창물산 위장폐업 투쟁 참여, 주안5동 세입자대책위 참여, 학익동 철거민을 위한 바자회 개최 등을 지원하고 지방자치제 대책위 활동을 벌였다.

89년 2월 교육사업으로 ‘민중학교’를 개설했다. 이후 교육사업으로 민중문예교실, 민중역사교실, 노동교실, 여성교실, 민중교양강좌 등을 실시했다.

87년 대선 패배와 분열의 아픔을 겪은 인사연은 88년 들어 조직을 추스려 기관지 ‘인천의 소리’를 발간하며 활동을 폭을 넓혀갔다.

‘인천 민주시민학교’를 개설해, 대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넓혀 88년 12월 북부 지부를 개설하고, 89년 들어 남부지부를 창립해 외연을 넓혔다.

그러나 92년 들어 동구 사회주의 몰락, 운동권의 위축과 분열 등 국내외 정세변동과 이에 따른 인식의 변화와 내부의 불화 등으로 새로운 운동 방식을 찾아 전격 해산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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