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선주(船主)였지, 노예나 다름 없었습니다.” 옹진군 연평면 정철호(47)씨는 악몽과도 같았던 지난 3년의 세월에 치를 떤다. 30년 만에 이룬 ‘선주’의 꿈은 산산 조각나고, 1억7천만원의 빚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이작도가 고향인 정씨는 열네살때부터 배를 탔다. 대물림 하는 가난이 싫어서, 못 배운게 서러워서 죽도록 일했다. ‘나도 어엿한 선주가 되리라!’ 용 쓰며 고된 뱃일을 이겨낸 대가는 30여년 만에 다가오는 듯 했다. 2002년 12월30일 수산물 유통 판매업체인 D사가 새로 건조한 9.8t급 닻자망 어선과 어구를 4억5천만원에 건네 받기로 한 것이다.
정씨는 계약금 7천만원 가운데 2천만원을 D사 사장 유모(38)씨에게 주고, 잔금 5천만원은 한 달뒤에 치르기로 했다. 나머지 3억8천만원은 배를 부려 벌어서 갚기로 했다.
“그 계약이 바로 노예생활의 덫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적든 많든 정씨가 잡는 꽃게는 모두 유씨에게 넘겨줘야 했다. 냉동선을 갖고 있던 유씨는 정씨의 꽃게를 옹진수협에 위탁판매했고, 그 돈의 72%는 배 값으로, 나머지 28%는 배값(3억8천만원)의 이자와 꽃게 운반비 등으로 계산했다. 당시 유씨는 정씨 말고도 연평어선 9~11척이 잡은 꽃게를 모두 가져가는 이른바 ‘선단’을 짜고 있었다.
정씨는 부인 임상숙(47)씨와 선원 6명을 데리고 새벽부터 일했다. 한참 일할 때는 얼른 돈 벌어 배 값을 모두 갚을 요량으로 배고픈 줄도 몰랐다. 정씨는 2003년 봄철 3억8천만원을, 가을철에는 5천만원을 포함해 한해동안 4억3천만원어치의 꽃게를 잡았다.
“일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것은 빚이었습니다.” 유씨는 2억6천만원을 배값으로 가져갔다. 나머지 1억7천만원은 이자와 운반비 등 위탁판매비로 떼어갔다. 죽도록 일만했지 실제 정씨 손에 들어온 돈은 한 푼도 없었던 셈이었다.
오히려 정씨에게 빚만 늘어났다. 그물값과 기름값, 선원6명의 생활비(한철 선원 1인당 생활비 500만원~700만원) 등으로 1억7천만원의 빚을 내야만 했다.
정씨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4년 4월 유씨가 ‘값을 치르지 않으니 배를 되돌려 달라’며 떼쓰기 시작하더니 정씨의 배를 출항 정지시켰다. 게다가 배의 명의를 정씨에게 옮겨주지도 않은 채 배를 담보로 옹진수협에서 5천만원까지 대출받은 상태였다.
“계약금 5천만을 줄테니 ‘배의 명의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어도 소용없더라고요.” 결국 유씨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운영하던 D사를 부도낸 것이다. 그 여파는 정씨에게 고스란히 떨어졌다. 유씨가 수협 대출금을 갚지 않은 탓에 배는 공매처분돼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유씨는 종적을 감춰버려 연락이 끊겼다. 배를 빼앗긴 정씨는 지금 남의 배 선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것도 꽃게를 잡은 만큼 가져가는 ‘부합제’다. 정씨가 2년 동안 남의 배 선장을 하면서 번 돈은 빚의 이자도 못낼 3천만원이 고작이다.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어획량의 급속한 하락세에다 대출금의 증가로 서해 5도서의 어민 대다수가 깊은 시름에 빠져들고 있다. 이들 어촌은 몰락의 길을 걷고있다.
이들 도서민들이 한번 진 빚은 갚을 방도가 없다. 봄철 출어준비로 받은 대출금은 가을철이면 두 배로 불어나는 것은 예사다. 봄에 진 빚을 갚지 못한 채 가을이면 또 다시 수산물 유통업자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어구와 그물 등을 산뒤 또 다시 출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눈으로 뻔히 지켜보면서도 어민들은 출어를 포기할 수 없다. 얼마를 벌든간에 그 동안 빌려 쓴 돈의 이자라도 꺼나가려면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백령, 연평·소연평, 대·소청 등 서해 5도서를 관할하는 옹진수협이 어민들에게 대출한 영어자금은 모두 381건에 53억2천580여만원에 이른다. 대·소청도가 164건에 22억4천700여만원, 백령 103건에 17억7천900여만원, 연평·소연평이 114건에 13억980만원 등이다.
건당 많게는 2억5천만원에서 적게는 5천만원인 영어자금은 이율이 3%로 어민들이 출어준비를 하면서 배 등을 담보로 대출받는 자금이다.
옹진수협의 영어자금 가운데 어민들이 당장 갚아야 하는 대출금은 62건에 8억6천만원이다. 이 중 90%가 서해 5도서 어민들에 나간 돈이다. 이자도 못내고 상환기일(1년)이 지난데다 다른 금융권에서 진 빚을 갚지 못해 상환시기를 연장할 수 없는 대출금이다.
옹진수협은 그 동안 서해 5도서 어민들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터라 그 동안 나갔던 대출금 만큼 또 다시 대출해 상환하도록 했다. 실제 상황시기의 자동 연장였던 것이다.
영어자금 연체는 곧 어민들의 생명과도 같은 선박의 처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옹진수협이 지난 해 6월부터 지금까지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농신부)에 ‘서해5도서 어민들의 연체 대출금을 대신 갚아 달라’고 요청한 ‘대손판정 신청’ 건수만도 31건에 이르고 있다. 농신부는 대출금을 갚아주는 대신 어민들의 배를 경·공매로 팔아 넘겨 연체대출금을 충당하는 것이다.
인천지역 세무서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세금을 못낸 어민들의 선박을 자산관리공사에 공매를 내놨으나, 배를 팔아도 세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해 공매 자체를 포기한 경우도 12건이나 된다.
서해 5도서의 몰락은 해 마다 떨어지는 어획량이 원인이다. 서해 5도서 어민 중 옹진수협에서 대출받은 어민들의 지난 해 어획고는 2003년에 비해 46.5%대로 떨어졌다. 2003년 30억1천933만원이던 위판액은 2004년 13억3천443만원원, 2005년에는 14억466만원으로 감소한 것이다. 한편 연평도의 전체 57척 어선의 꽃게 어획고는 올들어 지금까지 5억3천328만원(어획량 2만2천263㎏)에 불과하다.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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