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으로 이룬

민주주의의 서막

올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이정표적 전환점을 가져온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해다.

20년 전, 민주화의 열망을 4.13 호헌조치로 무력화시키려 했던 독재권력에 맞서 14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악법을 지켜 권력을 독점하려던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길을 걷도록 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대중의 거리항쟁 참여였다.

절대 권력도 강고히 결합된 민주화운동 진영과 전국적인 민주화 열기에 군대를 동원하려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커다란 성과로 기록됐다.

냉전과 분단, 산업화 시기 개발독재로 이어져온 악조건의 한국사회에서 이룩한 자랑스런 시민의 힘이었다.

그것은 또한 60년 4.19 혁명, 80년 광주항쟁에 이어 전개된 한국 민주화운동의 최종적인 결과였다.



6월 항쟁으로 이뤄낸 것은 대통령 직선제와 정당정치의 정상화, 지방자치제 등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은 ‘최대 민주화연합’으로 불리는 ‘통합의 정신’으로 가능했다.

6월 항쟁을 앞두고 민주화운동 진영은 그간 조성된 광범위한 민주화 세력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권 전반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국민의 민주화 의지와 힘을 결집하여 5월27일 결성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에는 민통련 등 재야단체와 부문운동, 종교계와 야당 정치세력(통일민주당)까지 망라했다.

거기에는 급진주의를 완화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의 분열을 막으려했던 운동권의 노력이 있었다.

다소 이질적인 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연대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차별보다 제휴라는 지난 수년간의 반성을 통해 통합을 지향했다.

그리하여 일궈낸 직선제는 안타깝게도 양김의 분열로 기대했던 민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민주화는 제대로 진전하지 못했다.

청산되지 못한 독재세력은 국가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독재시대 형성된 사회기득권 세력을 대변하여 민주 개혁을 어렵게 했다.

또 한편으로 분열된 야당세력의 이합집산은 지역주의를 강화하며 정치권내 타협과 연합에 골몰, 시민사회의 이해와 요구를 올바로 대변하지 못했다.

시민사회와 유리된 특권화된 정치사회를 형성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정치 민주주의는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의 흐름과 괴리됨으로 사회적, 계층적, 지역적 갈등과 대립을 효율적으로 조정해내지 못했다.

민주화세력도 ‘통합적’ 6월 항쟁 이후,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급속히 분화, 분열됐다.

야당도 분열하고 지역도 분열됐으며 재야와 야당 사이도 분열했다.

재야 민주화운동권 자체도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보다 뚜렷히 분화하기 시작했다.

지체된 민주주의, 그리고 이어진 3당합당과 DJP연합 등 이른바 ‘변형주의’에 의한 보수적 민주주의의 이행은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와 분리된 결과였다.

한국의 정당과 의회 등 정치사회가 시민사회 공공의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 독자적인 이익을 실현하는데 열중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은 직선제로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확고히 했고, 다당제 등 국회기능을 정상화하는 등 법제화한 민주주의를 돌이킬 수 없게 함으로서 의미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은 우리에게 사회 전반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이행을 요구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와 공익에 봉사하는 내용적 정치민주화와 시민사회의 활성화다.

또 지방분권, 지역공동체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진전, 차별의 철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를 이루어 가는 일이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시민·사회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인천신문은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인천지역 사회운동 전반을 되짚어 보는 연중기획 ‘6월항쟁과 인천 시민사회운동 20년’을 연재한다.

1월12일 첫 회를 시작으로 격주 금요일자로 연말까지 25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기획을 통해 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분화해온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전개 과정, 90년대 중반 급성장한 시민운동의 발전 과정과 2000년대 활동 등을 현 시점에서 바라보며 인천지역 시민·사회운동의 성과와 한계, 과제를 살핀다.

인천지역 시민·사회운동도 통합과 연대의 힘으로 지역사회를 변화 발전시켜 나가기도 했으며 분열적 요소가 지역사회의 신뢰와 동력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각 분야별로 앞만 보며 전개해온 운동들을 이 시점에서 돌아봄으로 지난 운동의 성과가 지역사회 공동체에 기여한 것은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이었는지, 그것들이 지금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반독재 민중민주운동만이 사회운동의 전부였던 80년대 초·중반을 지나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시민운동이배태됐다.

‘최대 민주화연합’이 파열되고 분화·분열되면서다. 공개, 합법적인 공간이 확대되면서 민중운동은 전민련(인민련)·전국연합(인천연합) 등 전선운동을 비롯, 노동운동, 주민·빈민운동, 종교운동, 청년운동, 정치세력화 노선 등으로 확장, 발전됐다.

6월 항쟁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됐고 98년에는 정권도 교체됐다.

그렇지만 87년 대선 분열에 따른 민주정부 수립의 실패와 이후 이합집산의 정치, 이에대한 국민적 불신과 냉소는 내용적 정치 및 사회 민주화, 분권화의 과정을 더디게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중앙 정치의 볼모가 되어 주민의 참여와 믿음을 잃음으로, 주민 삶의 현장에 ‘자치’는 피부에 잘 와닿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시민운동에는 서구 등 다른 나라와 달리 이같이 채워지지 않는 실질적 민주화의 요구에 대한 강열한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사회정의의 실현, 차별적 요소의 철폐, 사회안전망 강화와 부동산투기 근절등 경제정의 및 분배의 정의 등이 그것이다.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교차하는 지점이 많은 이유다.

이번 연중기획은 이같은 관찰을 바탕으로 세 시기로 나누어 실을 예정이다.

첫째 시기는 87년 6월항쟁에서 첫 동시지방선거 전(87년 6월항쟁~95년)까지로 노동·민중운동 등의 분화, 정치세력화의 전개 과정, 초기 시민단체의 창립, 그리고 굴업도 핵폐기장폐기, 선인학원 시립화, 계양산살리기 등 지역 중요 현안에 힘을 합쳐 관철함으로서 운동의 모범을 보인 지역 시민사회의 연대활동 등을 다룬다.

둘째 시기는 95년 첫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 및 후보 검증 등을 위한 시민사회단체의 대응으로부터 시작한다.

판공비 공개운동 등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의 감시와 참여, 주민자치 운동, 지역현안 공동대응 사례, 북한동포 돕기운동, 실업극복 운동 등을 담는다.

세번째는 2000년대 시민운동으로 낙천낙선운동과 당선운동으로 부터 시작해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폭이 넓어진 남북평화교류 및 통일운동, 잇단 지역현안의 대두와 연대활동 등을 싣는다.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 글싣는 순서 >

▶ 87년 6월항쟁 ~ 95년
- 6월항쟁과 운동의 분화
- 독자 정치세력화 vs 야권단일화 운동
- 목요회에서 환경운동연합까지
- 연대의 힘, 빛을 발하다

▶ 95년 동시지방선거 ~ 2000년
- ‘자치’를 향하여
- 지자체 감시, 참여운동
- ‘부평시민모임’에서 ‘강화도시민연대’까지
- 전문 영역의 확장, 본격화한 분야별 운동
- 지역현안과 시민연대
- 북한동포에 옥수수를
-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철회 투쟁과 민주개혁시민연대 발족
- IMF와 실업극복 국민운동

▶ 2000년 낙천낙선운동 ~ 현재
- 낙천낙선운동과 당선운동
- 2000년대 시민단체
- 시민포럼의 전문화, 상설화
- 우리민족대회, 인천을 평화의 도시로
- 지역현안과 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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