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4·13 호헌조치 전국적인 반대물결

인천 운동권 수배 등 독재 탄압으로 진통

보통시민들 대대적인 시위 동참 분위기 반전

87년 6월10일 오후 6시, 긴장감이 감돌던 부평역 일대에 택시들의 경적 소리가 요란이 울려퍼졌다.

잠시 후 십자가를 앞세운 시위대가 도로에 나타났고 곧이어 주변의 시민, 학생들이 ‘호헌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몰려들었다.

최고조에 이른 이 땅의 민주화의 열기가 이승만 정부 이래 계속되던 절대 권력을 굴복시킨 6.10 항쟁.




6.10 항쟁은 민주화운동권만이 아닌 중산층 시민까지 가세함으로서 독재정권의 굴복시켰다. 6월10일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천의 6.10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거리에서 구경만 했던 보통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굳게 뭉친 대중의 힘과 그 ‘감동’은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19일 후 6.29를 통해 직선제를 수용케 했다.

인천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은 87년 5월 공개활동이 가능한 8개 단체를 중심으로 ‘4.13 호헌분쇄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지역공대위’(공대위)를 결성했다.

그렇지만 공대위 실무회의에는 8개 단체 외 비공개로 활동하던 노동운동 단체와 학생 등 민주세력 전반이 자리를 함께 해 전략을 세웠다.

5.3 인천항쟁 후 인사연, 인노련 등 운동권 지도부에 대한 구속, 수배 등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 등 악조건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나 5.3 이후 운동권 만이 아닌 시민과 학생 등 오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분위기는 고양되고 있었다.




6월 항쟁에는 일반시민들도 적극 호응하고 시위대를 지원했다. 버스에서 승객이 최루탄을 쏘지 말 라고 외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선언했고 이에 민통련과 종교단체 등 재야단체는 통일민주당, 민추협 등을 망라, 5월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을 발족했다.

그리고 민정당 후계자 지명일인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과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국본 이전에 구성된 인천지역 공대위는 5월24일 부평역에서 ‘광주영령추모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시민대회’를 열었다.

인천의 6월항쟁은 이날 부터 일기 시작한 것이다.

5.24 시민대회는 오후 5시경 3백여명이 부평로타리에서 모이기 시작해 부평1동성당, 부평시장, 백마장 입구 등지로 확산되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북구청(현 보건소) 앞 도로에서는 2천여명이 인도와 차도를 점거하며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국본이 국민대회를 열기로 한 6월10을 맞아 공대위는 오후 6시 ‘6.10 인천시민대회’라는 명칭으로 부평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6시, 부평역에 모인 시민, 학생들은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프랭카드를 앞세우고 전경과 대치하며 대중집회를 열었다.

이때 모여든 시민이 2천여명에 이르렀다. 오후 7시가 지나면서 시위 군중은 3천여명으로 늘었고 이들은 대우자동차 앞을 지나 공단쪽으로 행진을 벌여 9시경 청천시장 앞까지 이르렀다.

경찰은 시위대를 포위하고 최루탄을 쏴 해산시켰으나 잠시 후 시위대는 다시 합세하여 행진을 계속했다.

거리의 시민들도 박수로 환영하고 격려했다. 오후 10시에 이르러 시위대는 7천여명으로 불어나 다시 부평역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11시30분경 부평역 앞에서 해산했다.

인천 공대위가 주도한 6.10 인천시민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후 정권은 12일 인천 공대위 소속단체인 인사연의 안영근 집행국장, 가톨릭노동청년회 인천교구연합회 강석태 회장, 인천기독청년협의회 김영철 회장 등 3명을 연행, 16일 집시법 위반으로 전격 구속했다.

나머지 5명의 공대위 대표도 수배령을 내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민주화의 열기를 다잡으려 했다.

그러나 공대위는 6월26일 오후 6시 부평역 광장에서 공대위 주도의 공식 집회를 열기로 하고 조직을 추스린다.

6월14일 인하대생들이 교외 시위를 시작했고 공대위의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인천시민 평화대행진’이 전개된 26일까지 인천지역의 6월항쟁은 연일 계속됐다.




6월 항쟁에 나선 인하대생들이 집회를 갖고 있다. 인하대생들은 6월14일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교외시위를 벌였다.

국본이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해 범국민적 운동이 전개된 6월18일 부평지역에서의 시위에는 1만여명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하며 새벽 3시까지 귀가치 않고 시위와 연설을 계속했다.

이때 경찰은 최루탄 난사와 함께 각목을 동원 폭력적인 진압에 나서 새벽 5시까지 700여명을 연행했다.




6월18일은 ‘최루탄 추방의 날’로 범국민적 집회와 시위가 일었다.

6월항쟁의 절정을 이룬 26일, 공대위는 부평역과 백마장 부근에서 2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오후 9시경 경찰이 강제해산에 나섰으나 노동자, 시민, 학생등이 합세, 석바위로 재집결해 11시30분경까지 집회를 계속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6월 항쟁 일지>

6.10 항쟁을 전후해 인천에는 공동대책위가 출범해 집회를 이끌었다.

공대위는 5월24일과 6월10일, 6월26일 등 공식적으로 3개의 집회를 준비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인하대, 인천대 학생을 비롯한 종교계, 노동계 등의 시위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6월10일부터 6.29가 발표될 때까지 거의 매일 계속됐다.

- 5월24일; 공대위, 오후 5시 부평역 ‘광주영령추모 및 민주개헌을 위한 인천시민대회’ 개최

- 6월10일; 공대위, 오후 6시 부평역에서 ‘6.10 인천시민대회’개최

- 14일; 인하대생 비상총회; 3천여명 답동 가톨릭회관 앞~ 동인천역 도로 점거 시위.

- 15일; 인하대생 오후 2시, 시민회관앞서 시민과 함께 4천여명 집회

- 17일; 오후 5시 동인천역 광장 7천여명 대중집회.
오후 8시 주안1동성당 정의평화위원회 주최 기도회. 4천여명 시가행진 석바위 4거리 도로점거, 집회.

-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범국민적 운동. 송림동 오성극장 앞, 송림로타리 연좌시위. 부평역 광장앞, 백마장입구, 청천동 대중 집회

- 20일; 오후 2시 인하대, 인천대 학생 교내에서 ‘최루탄 추방 인천시민대회 경과보고’ 시위

- 21일; 오후 6시 동인천 학생, 시민 5천여명 가두 시위

- 26일; 오후 6시 부평역 광장, 백마장 입구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평화대행진’







권병기씨(당시 인사연 집행국장 대행)

“인천 공대위도 국본과 같이 대중성 있는 인사가 앞장 서줘야 하는데, 지역에 그런 어른층이 두텁지 못한데다, 있던 지도부 마져 구속 수배당한 때라 집회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상층부와의 연결고리도 원활치 못했습니다......

조직 내부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6.10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치 못했던 시민들의 호응이었습니다.

구경하던 시민들이 ‘참여’로 전환하는 것을 보니 놀랍기도 했고 힘도 났습니다.”



6월항쟁 당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집행국장 대행이었던 권병기씨(47).

그는 안영근 집행국장이 6월10일 집회로 전격 구속되자 그 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대표들이 구속된 공대위의 6월26일 집회 ‘민주헌법 쟁취 인천시민 평화대행진’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감시망을 피해 부천 삼정동성당에 본부를 둔 공대위에는 15~20여명의 실무회의진들이 모여 정세를 파악하고 내부조직 동원 등 집회를 준비했다.

“6월10일 집회시 부평역에서 집결한 시위대가 백마장 입구에서 청천동 대우자동차 쪽으로 들어가 효성동까지 진출했는데 경찰이 뒤쪽을 차단하며 시위대를 깨고 마구잡이로 연행해 갔습니다.

26일 집회는 백마장 입구에서 1차 집회를 가졌는데 10일 집회보다도 더 살벌했습니다. 정치권에서 들려오는 분위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독재세력의 탄압이 다시 재현될 수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이런 살벌함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6월항쟁의 중심고리를 광주문제의 해결과 민주헌법 쟁취, 독재타도로 하고 직선제를 내걸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민중헌법, 삼민헌법 등과 관련돼 이어져온 논쟁에서 그는 직선제로 일반시민들과 함께 정권과의 총체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무직, 회사원, 아주머니까지도 대학 아니면 접근할 수 없었던 데모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6.10항쟁으로 학생운동 출신이 아닌, 운동가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인사연 간부도 맡아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운동의 외연이 넓어지면서 시민운동의 뿌리를 심어나가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민주화운동이 분열의 모습이 보이거나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항상 시민과 함께한 6월항쟁의 교훈을 되살리곤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92년 해체될 때까지 인사연 실무자로 계속 남았다.

사회운동을 더 해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있다. 그리고 같은해 출범한 ‘계양산살리기범시민운동추진위원회’ 사무처장으로 실무 책임을 맡아 시민운동을 계속했다.

80년 광주항쟁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81년 5월17일 서울대 시위사건으로 강제징집됐다.

그후 서울대에 복학한 것은 94년이었다. 그는 99년 졸업해 길병원 인턴 등을 거쳐 지난 2003년에야 연수동에서 ‘서울가정의학과의원’을 개원했다. 송정로기자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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