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이성권 인천축산업협동조합장

4대에 걸쳐 인천에 사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천은 개항 후 발전한 도시여서 타도시에 비해 토박이가 적은 편이다.

이성권(53) 인천축산업협동조합 조합장의 가족은 100여년 전 인천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천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현재 연수구 동춘동에서 태어나 그동안 인천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먼 거리를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는 인천 사람으로 자부심을 갖고, 지역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누구보다 인천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 키우는 일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5남매 중 막내였지만 형들이 다른 직업에 종사해 부친을 따라 다니며 소와 관련한 여러 경험을 했다.

그의 집은 인천에서 손꼽힐 정도로 한우가 많았다. 1970년대 인천에서 한우 300마리를 사육하는 축산 농가는 드물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기대지 않았다. 독립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1981년 그는 농어민 후계자(현 농어업경영인)으로 뽑혔다. 인천에서 1기, 1번이었다.

그는 수원 농민 교육원에서 1달 동안 집중 교육을 받으며 선진 농업과 축산업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앞으로 우리 나라 농업·축산업도 선진국처럼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농어민 후계자로 선정되자 정부에서 400만원을 지원했다. 물론 갚아야할 돈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한우 8마리를 샀다. 독립을 위한 첫 단계였다. 그리고 부업으로 인천에서 처음으로 느타리 버섯을 재배했다. 스스로 공부를 한 것은 물론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를 찾아 지도사의 도움을 받았다.

느타리 버섯 재배는 성공했다. 축산을 하는 것보다 많은 수입이 들어왔다. 1㎏에 1만∼1만3천원을 받을 정도로 느타리 버섯은 고가로 거래됐다.

“출하를 하면 오림포스 호텔에서 바로 구매했습니다. 이 때 농사를 지어도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느타리 버섯으로 번 돈으로 소를 더 구입하는 등 축산 사업에 투자했다. 정부의 권장 등으로 한우를 키우던 그는 젖소로 눈을 돌렸다. 젖소는 60마리 정도로 인천에서도 제법 규모가 있었다. 1983년부터 젖소에서 나온 원유를 지금은 없어진 인천우유에 납품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전국 방송에서 취재를 나올 정도로 점차 알려졌다. 또 정부로부터 우수 농업 경영인으로 선정돼 표창도 받았다.

그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농업인들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실천을 한다.

미꾸라지 양식이 한 예다. 그는 소득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논 1천㎡를 파서 저수지를 만들어 비늘을 깔고, 다시 흙을 덮어 미꾸라지를 길렀다.

농민들이 골칫거리 중 하나는 참새였다. 농민들은 벼 이삭이 나올 때 참새를 쫓는 일로 애를 먹었다. 그는 효과적으로 참새가 논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양한 방법을 생각했다.

여러 시도 끝에 나이트 클럽에 있는 사이키 조명을 응용해 공처럼 모양을 만들어 깨진 유리 조각을 붙여 논에 매달았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빛이 사방으로 퍼져 참새들이 벼에 다가가지 못했다.

“새로운 농업기술을 배우고 실험을 자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보다 앞선 일본 농업을 알기 위해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공부를 한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 2008년 가천의과학대를 졸업했다. 내년에 인하대에 입학해 석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잡았다.

그는 축산과 농업 일을 시작할 때부터 인천축협 조합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인천축협은 1987년 운영하던 인천우유를 동서우유로 넘기면서 서서히 기울었다. 인천축협은 그가 납품한 원유 대금을 현금 대신 분유로 줄 정도로 어려움에 처했다.

인천축협 대의원 등을 거친 그는 2002년 인천축협 조합장이 됐다. 조합장 자리에 올랐지만 인천축협을 어떻게 이끌지 막막했다. 인천축협은 자기자본을 완전 잠식한 상태였다.

그는 조합장 취임 후 인사를 위해 찾아간 농협 인천지역본부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조합과 합병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합병안을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부결됐다. 다시 대의원 총회, 조합원 총회에 올렸지만 통과가 이뤄지지 않았다.

인천축협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농협 인천본부도 1년 동안 관리역을 보내 도왔다. 먼저 그는 자신이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조합 차 대신에 자신의 차를 직접 몰았다. 기름 값 등 유지 비용도 그의 주머니에서 나갔다.

그리고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는 임직원을 감축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재조정했다. 지점 1곳도 없앴다. 140여명이던 임직원이 80여명으로 줄었다.

또 임직원들이 조합원들에게 다가가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와 관련한 조치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끼던 직원들을 내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천축협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인천축협은 불과 1년만에 자본 잠식 조합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2003년부터 매년 평균 13억원의 이익을 내고 있다. 지난해 인천축협의 자본금은 160억원이다. 이제는 정상 조합이 됐다.

지난해 구제역으로 한국의 축산업이 존폐 위기에 처했을 때 인천축협 조합원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미 이에 대한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한 돼지 농가에서 살처분이 있었지만 구제역 때문이 아니었다. 구제역이 발생한 축산농가의 반경 3㎞ 내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돼지들이 살처분 됐다.

그는 가축의 면역력을 높이려고 미생물을 이용한 방역 등의 사업을 일찍 시작했다. 인천시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해 남동산업단지에 있는 기업에서 생산하는 미생물을 농가에 보냈다. 이 미생물은 가축에 먹여도 되고, 축사에 뿌리면 냄새가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구제역을 원천봉쇄하려고 미생물 생산 기업들의 자문을 얻는 중이다. 또 미생물을 계속 조합원에 공급하고 있다.

“구제역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하고, 고품질의 먹을거리를 인천시민들에게 공급하는 것은 인천축협의 사명입니다. 시민들에게 외면 당하는 조합은 얼마 가지 않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조합이 기본에 충실해야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농산물 수입 개방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동안 인천축협만을 생각한 것이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 인천축협이 지역 사회의 한 일원으로 역할을 해야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인천축협은 지역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실행에 옮긴다. 매년 1억6천만원을 저소득층, 장애우 등 소외계층을 위해 장학금, 생필품 공급 등으로 내놓고 있다.

특히 그는 인천의 정체 확립에도 신경을 쓴다. 인천의 정체성을 위한 노력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없어 시간을 갖고 움직일 계획이다. 그는 자신의 힘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그는 “인천축협은 인천시민, 국민들에게 안전한 축산물을 공급할 책임이 있다”며 “앞으로 인천축협을 인천시민과 함께 하는 조합, 개인적으로는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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