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2월7일, 지역 최초의 공개적인 노동운동 단체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 인천지역협의회(인천노협)가 답동 가톨릭회관에서 창립돼 본격적인 지역노동운동의 서막을 올렸다.

인천노협은 83년 중반부터 분출되기 시작한 지역 노동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년 후 인천노협은 공개 운동에 한계를 느껴 발전적 해체를 결정하고 비공개 조직(인노련)으로 전환, 86년 5.3 인천항쟁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정치투쟁을 전개한다.

인천노협은 70년대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간부, 조합원을 비롯, 80년대 새롭게 활동한 노동자 출신과 함께 당시 인천에 집중적으로 유입된 학생출신 노동활동가를 포함해 지역노동계 전반을 아우르는 한편, 천주교 인천교구, 인천 산업선교회(산선), 기독교노동자총연맹 등 신, 구교의 후원을 받고있었다.

한편 한국노협은 84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반합법 노동단체’로 지학순 주교를 이사장으로 창립됐다.




85년 4월10일 노동운동 탄압규탄대회를 위해 부평1동 천주교회에 미리 들어가 있던 해고노동자 20여명이 민주노조 운동을 지지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노협은 84년 9월27일 인천에서 노동법 개정촉구대회를 여는 등 노조의 결성과 활동을 크게 제약한 노동법 개정 서명운동과 집회를 비롯, 대중적 제도개선에 힘을 모았다.

인천노협을 창립한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한국노협의 직책을 같이 맡으면서 활동을 벌였다.

인천은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당시 결성된 민주노조와 블랙리스트에 의한 탄압이 심해 독자적으로 대응할 지역조직이 강하게 요구됐다.

인천노협 의장은 전 청계피복노조 지부장으로 인천 산선 간사를 지내던 양승조가 선임됐고 서기화(삼익악기 블랙리스트 해고자), 이교일(코리아스파이서), 진금숙( " 퇴사자), 김복자(삼원섬유 해고자), 김명종(삼익악기, 경신공업 해고자), 김일섭(진도 해고자), 전희식(대우자동차 해고자), 정명자(동일방직 해고자), 한덕희(경동산업 해고자), 박윤배(대우중공업) 등이 주요 멤버로 참여했다.

85년 4월10일 인천노협은 부평1동 천주교회에서 노동운동 탄압규탄대회를 열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로 무산됐다.

그러나 미리 들어가 있던 해고노동자 20여명이 농성에 돌입했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부평역, 부평시장로타리 등지서 부당해고 중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25명이 연행됐다.




85년 4월10일 인천노협은 부평1동 천주교회에서 예정된 노동운동 탄압규탄대회가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부평시장 로터리, 부평역 등지서 시위를 벌였다. 사진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노협은 85년 4월 진행된 대우자동차 파업농성을 지원하고 대한마이크로 전자(부평4공단), 동보전기(부평4공단 앞), 한일스텐레스(효성동), 대림자동차(부평동) 등지의 해고자 탄압 등 당시 장기화하고있는 노사문제에 대처하는 센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대우자동차 노조 조합원들은 ‘민주파’ 대의원 대표인 홍영표를 교섭대표로 참여시켜 파업 열흘만에 임금협상을 타결지었다.

송경평 홍영표 박재석 등 학생출신의 노동자들이 조합원의 신뢰속에 기존 노조집행부를 제끼고 김우중 회장과 직접 협상을 벌여 얻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파업을 주동, 선동한 혐의로 이들은 노동쟁의조정법 위반과 폭력 혐의등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의 실형 등을 선고받았다.

인천노협은 86년 2월7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으로 재편된다.

인천노협의 공개적인 활동, 즉 노조결성, 사내 투쟁 지원이나 노동법 상담 등만으로는 사업장에서의 탄압과 구속, 블랙리스트에 의한 대량해고로 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사내 복리 (경제)투쟁만으로는 폭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선도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을 모은 것이다.




85년 4월22일 사측과 임금협상 중인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있다. 대우차 노조는 이때 민주적인 노조 협상대표에 의한 협상을 이뤄냈다.

인노련은 86년 봄부터 가두시위에 나선다. 이렇게 시작된 ‘해방 이후 최초의 노동자들의 비합법적 정치투쟁’은 이해 5.3 인천항쟁까지 이어진다.

86년 3월10일 인노련은 노동문제를 이슈화 하기 위해 계양산에서 집회를 가지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로 강화 전등사까지 밀리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4일에는 주안6공단에서, 4월12일에는 부평역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여 38명이 연행된다. 그리고 5.3을 맞는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85년 2월 인천노협 부터 88년 인노협까지

85년 2월 창립된 인천노협에서 부터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88년 6월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결성에 이르기까지, 인천에는 민주노조 건설이란 책무앞에 노동단체와 서클이 상당수 활동했다.

80년대 인천은 특히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많았다.(86년 기관장 회의자료에 신원확인된 인천지역 ‘위장취업자’만도 246명으로 서울 181, 경기 178, 부산 40, 광주 20, 대구 15명에 비해 월등했다)

85년 12월 구월동 창신교회에서 청천동 백마교회 등 민중 교회 청년회 회장 등이 주축이 돼 인천기독교노동자연맹을 창립했다.

전국기독노련과 함께 대규모 노동절대회를 열어 시위를 벌이고 5.3항쟁에도 참여했다.

87년 3월에는 인천노협이 인노련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던 일부 조직원들이 인천노협을 복구했다.

‘인천민주노동자연합’(인천노련)으로 이름을 바꿔 93까지 노조 지원과 상담활동을 벌였다.

87년 6월에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창립됐다.

최봉근, 정태윤, 노회찬, 황광우 등 대학출신 활동가들이 결합,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후 곧바로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를 모태로 6월26일 창립했다.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 등 기관지를 발간하며 노동조합에 대한 공개지원을 위해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등 상담소를 세웠다.

91년 12월 전위조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에 나서 한국노동당 준비모임인 노동자정당추진위(노정추)를 발족한다.

87년 8월 민주노조 운동의 지원조직으로 ‘인천지역민주노조건설 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가 창립됐다.

비합법 써클들의 협의회에서 지원자들을 파견해 독자적으로 운영됐다. 88년 10월 해산 때까지 ‘민주노조’ 신문을 발행하며 노동상담, 교육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88년 2월, 87년 대선을 앞두고 독자노선을 결정한 인민노련을 탈퇴한 조직원 일부를 포함해 100여명이 인천부천지역민주노동자회(인부노회)를 창립했다.

인민노련과 노선을 달리한 인부노회(NL계열)는 공개적이고 정치적 대중조직을 표방하며 노조 지원과 노동법 개정 투쟁, 전두환 노태우 구속 시위 등 정치투쟁을 벌였다.

89년 2월 조직원 6명이 구속되면서 활동이 일시 중단됐다 인사연과 통합한다.

88년 5월 노동단체들의 상설적인 협의체를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인천지역노동운동단체협의회’가 구성된다.

공실위와 산선,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인부노회, 인천노련,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가톨릭노동청년회 등 8개 공개, 비공개단체들이 모여 발족했다.







양승조 전 인천노협 의장

양승조(57) 전 인천노협 의장. 그가 기자와 인터뷰한 날은 우연히도 전태일의 기일이었다.

70년 11월13일, 양승조는 전태일과 함께 근로기준법 책 화형 시위를 위해 피켓과 프래카드, 시너를 마련하려 거리를 돌아다녔다.

74년 청계피복노조 지부장이 된 그는 76년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정화대상’이 돼 해직됐다.

74년 9월 시위 주모자를 도피시킨 혐의로 구속당했던 그를 중정은 청계노조에 간여도 못하게 했다.

78년 2월 인천 경동산업에 자리잡아 일했으나 8개월만에 10.26 사태가 터져 검거 선풍이 일면서 떠나야했다.

이 후 이태복 등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하다 81년 8월 검거됐다.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한달여간 전기, 물, 고추가루 고문을 당하고, 2년간 옥살이 후에는 ‘공포증’에 시달려 큰 고생을 했다.

그런 후 그는 ‘한국노협’ 부위원장으로, 이어 ‘인천노협’ 의장으로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한 복판에 뛰어든다.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의 강압정치가 한계에 온 83년, 일련의 유화조치가 있었습니다. 민주인사가 석방되고 민주노조를 만드려고 싸우는 곳도 있었고 만든데도 있었습니다. 이때 한국노협을 창립하고, 지역 노동운동가의 필요에 의해 인천노협을 건설했습니다”

“하루 저녁, 결정을 내리면 수천명을 동원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당시 인천의 활동가는 거의 다 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5년 인천의 노동운동은 부평3동성당에 자리한 인천노협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기관원도 상주했다.

성당 주변에서 사무실 출입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했다. 위장취업자는 연행당했고, 기관원과 이런 문제들로 실랑이를 벌이다 폭력 혐의로 구속되는 노동자도 발생했다. 이듬해 인천노협은 인노련으로 전환했다.

“사내 복리투쟁, 경제투쟁 가지고는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그 사실이 1년간의 인천노협 활동을 통해 다시 분명해졌습니다. 정치투쟁을 하지 않고서는 노동조건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 것입니다.”

인노련은 내부 강령을 정치투쟁 쪽으로 잡았다. 노동자의 정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당시 노동자에게 이때부터 5.3 항쟁까지 전개한 가두시위 등 선도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이었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다수의 참여가 아닌 선진적인 몇사람이 앞장 선 선도투쟁이 대중적 지지가 없을 때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도투쟁도 필요하지만 대중적 지지속에 해야하며, 경제투쟁도 적절히 병행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죠.”

그는 경제투쟁은 방치하고 정치투쟁에 편향된 것에 대한 문제를 인정했다.

그러나 노동자도 정치투쟁을 할 수 있고 해야된다는 점을 인식시켰다는 면에서 정치투쟁은 긴 노동운동의 여정에 있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86년 5.3항쟁 직후 그는 지명 수배됐다가 89년 12월 5.3과 관련, 유일하게 잡히지 않은 채 수배해제됐다.

그는 잡히면 안될 사람이었다. 모든 책임을 자임한 본인은 물론 조직의 많은 사람이 큰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수배기간이야 말로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가장으로서 생계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는 수배당하지 않고 잡혀야했다고 말한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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