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11월19일 오후 7시, 답동 가톨릭회관에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 창립대회가 열렸다.

전두환 정권의 등등한 위세로 엄혹했던 80년대 중반, 운동역량이 서울에 집중됐던 때, 인사연은 인천지역 최초의(종교계통 운동단체는 제외한)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로 발족하여 92년 해체할 때까지 6월항쟁 등을 주도하며 인천지역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잡는다.

80년 6월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탄압에 한계를 느끼고 83년 12월 제적생의 복교 허용 등 ‘학원자율화’란 유화책을 썼다.

서울에서는 김근태를 의장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83년 9월 발족, 공개적인 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이 과정에 참여한 이우재 등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세력은 10개월여 논의와 준비를 거쳐 노동운동권을 제외한 지역 운동역량 전체를 아우르는 인사연을 창립한다.




인사연은 85년부터 4.19, 5.18 등 기념집회를 열고 성명 발표와 시위를 통해 독재정권에 항의하고 민주화 투쟁을 벌여나갔다. 사진은 89년 5월14일 광주항쟁 기념집회 후 중구 답동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

가톨릭계를 대표해 제정구(초대 의장) 이명준(부의장), 김영준 개신교를 대표해 김정택(부의장) 이민우,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로 이호웅(2대의장) 황선진 김도연 한상희 이우재 조용호, 여성으로 장정옥이 발기인이 됐다.

인사연은 창립선언문에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계층간 뿐 아니라 지역간 위화감을 조성시키고 있슴을 상기시키고 범국민적 민주화운동과 함께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사회운동의 성장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이에 당면 과제로 인천지역 민주노동운동 발전에의 동참과 지원, 빈민촌 주민들의 철거, 무분별한 공장유치로 인한 공해, 영세민 생존권, 땅투기 문제와 남녀차별 등 지역사회 운동 전반을 망라했다.

활동가들은 이같은 문제의식으로 민주화운동의 쟁점을 정립하는 한편, 84년 12월 창간된 기관지 ‘민주화의 물결’(후에 ‘인천의 소리’로 개칭)과 전단을 통해 시민들에 알려나갔다.

인사연은 이를 성당, 교회, 단체에 배포하거나 회원들이 직접 일반 가정집에 투입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인천에는 공개 운동단체로 종교계통 외에 노동악법 개정, 블랙리스트 철폐 등을 요구하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지역협의회(인천노협, 85년2월 창립)가 있었고 소규모 비공개 써클 정도가 활동하고 있었다.




87년 6.29선언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인사연은 대중과의 접촉을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개설된 인천민주시민학교는 공개강좌를 통해 시민 의식화 교육을 진행하고 회원 확충을 기했다.

85년 4월10일 인사연은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를 열다 25명이 연행돼 여성부장 최인숙등이 구류처분을 받는다.

4월18일에는 인천노협과 함께 시민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19 혁명 25주년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광주사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전두환 방미반대 등을 성명으로 채택했다.

5월17일 인사연은 천주교 인천교구청년회, 인천산업선교회, 인천기독청년회 공동으로 가톨릭회관에서 ‘광주 5.18 민중항쟁 5주기 추모제’를 열고 가두방송, 시위를 벌였다.

고남석 조용호 등 회원 9명이 이일로 구류 처분을 받는다. 인사연은 시급한 현안이 제기되거나 4.19, 5.18 때 기념집회를 열고 성명서나 유인물를 통해 인사연의 입장을 밝히며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했다.

인사연은 85년 하반기,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사업의 중점을 두게 된다.

인사연 지도부는 이해 여름 활동방향과 관련 ‘노동운동 지원’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정치투쟁’에 각각 중점을 두자는 의견이 대립했으나 후자쪽이 다수를 점하면서 9월 총회에서 조직개편을 통해 운동방향을 정리한다.

조그만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항의마져도 정권에 의해 봉쇄되던 때, 일상의 사회개혁과 대중운동은 결국 정치투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상황 인식이었다.

인사연은 86년들어 2.12 총선으로 급부상한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도별 지부결성대회를 맞아 5월3일로 예정된 인천지부 결성대회를 민주화운동의 전기로 삼기위해 총력을 기울여 준비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인사연에서 인천연합까지

인천지역 사회운동 연합체의 굴곡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전두환 노태우 시절, 재야 및 각 부문 운동단체들은 전국 및 지역단위로 하나의 깃발 아래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세력을 규합, 독재정권에 대항해야 했다.

인사연은 85년 3월 창립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 지역운동협의회에 소속돼 활동했다.

인사연은 86년 5.3 행사를 주도하면서 주요 간부가, 수배되고 극심한 탄압과 감시로 활동은 위축됐으나 이해 11월 인천기독청년협의회, 천주교인천교구청년회, JOC(인천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5개 단체로 ‘장기집권음모 분쇄를 위한 인천지역공동대책위’(공대위)를 건설하여 87년 싸움을 전개했다.

민통련은 87년 5월 통일민주당과 민추협 등 제도권 정치세력과 가톨릭, 개신교, 여성, 노동자 등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6.10항쟁과 6.29 선언이란 결실을 맺었다.

인천에서는 인사연의 간부 공백기를 맞아 공대위가 국본을 대신해 6월 항쟁을 전개했다.

6.10 항쟁의 성과로 인사연 지도부 일부가 수배 해제돼 인사연은 87년 9월 인천 국본을 결성하고 대선국면을 맞는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앞두고 양김이 갈라지는 상황에서 민통련은 와해된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파, 양김 단일화를 주장하는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우자는 독자후보파로 분열된 것이다.

이때 인사연도 민통련이 결정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놓고 둘로 갈라지는 시련을 겪는다.

87년 대선 패배와 분열의 아픔을 겪은 후, 민통련 후신으로 그 이념을 계승하여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89년 1월 공식 출범했다.

인사연은 88년 9월 전민련의 인천 조직인 인민련에 가입했다. 인민련에는 인사연과 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천노운협), 인천민중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여노회) 등이 참여했다.

인민련 초대의장에 당시 이호웅 인사연 의장이 선임됐다.

인민련은 89년 전교조 대량 해직 사태에 따른 항거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결성에 힘을 모았으며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운동 집회 등을 벌여나갔다.

전민련은 이후 이부영, 장기표 등이 독자정당(민중당) 건설을 위해 빠져나가 세가 약해졌다.

인민련의 경우 황선진, 안영근 등이 빠져나갔다. 전민련은 조직 강화냐, 조직 재편이냐의 갈림길에서 다시 대선을 앞두고 전노협이라는 대규모 노동조직을 끌어들여 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라는 조직재편의 길로 나갔다.

전국연합 산하 인천연합은 양재덕을 초대의장으로 92년2월 설립됐고 인사연은 91년 12월 가입했다.

인민련은 92년말 조직을 해소하고 인천연합과 통합했다. 초기 인천연합 소속단체로 인사연, 인민련, 인노협, 인천노운협, 인천대학생대표자협의회(인대협), 인천민중연합, 여노회 등이 있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인사연의 산파 역할 이우재씨

“처음엔 청년단체 성격으로 가려했는데 여의치 않았습니다. 당시 인천에 학생운동 출신의 빵잽이가 4,50명(노동운동쪽 뻬고) 정도됐는데 서로 입장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고 해서 답이 안나왔어요. 그래서 종교계를 포함해 다 끌어안기로 한 것입니다”

인사연의 산파역을 맡았고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어온 이우재씨(50). 그는 85년 9월부터 집행국장을 맡아 5.3행사를 주도하는 등 실무진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고 해산될 때까지 인사연과 함께 했다.



인천출신인 그는 78년 6월 발생한 서울대 데모사건으로 구속돼 79년 8월 출소 전까지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거기서 인하대에서 학생운동하다 들어온 조용호 안영근과 만난 것이 인천의 사회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조직을 꾸리는 계기가 됐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운동가들이 전면에 나설 여건이 안됐다. 재야 명망가나 종교인을 대표로 정권 탄압의 보호막이 필요했는데, 그 정도도 가능했던 것이 당시 인사연 밖에 없던 때였다.

“83년 12월 유화조치가 있었는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정권의 필요와 운동권의 치열한 도전이라는 양면성을 안고 취해진 것이죠. 그때 공개적 운동단체가 뜰 수 있을지 반신반의 했는데, 과감히 뚫고 나가니 됐던 겁니다.”

노동운동의 메카라 불렸던 인천에서 인사연은 노동운동과의 관계 정립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시대는 그 이상을 요구했었다.

“무지무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인사연은 초기부터 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고 지원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사연이 환경, 빈민, 노동운동의 주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외곽을 지원하고 필요할 때 공개적 집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사연 규정 놓고 노동운동만 지원하라고 한 쪽도 있었는데 이런 일로 85년 가을이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그 때 노동운동 지원은 노동단체에 맡기고 정치투쟁 쪽으로 방향을 정리한 것이죠.”

“당시는 자생적 대중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항의만 해도 잡혀가는 시절이었습니다. 임금투쟁도 결국은 정치투쟁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죠. 민주화부터 이뤄놓지 않고는 모든 대중운동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말 만 해도 끌려가는 세상이었으니 엄두도 내지 못했죠.”

그는 78년 긴급조치 9호로 처음 ‘빵잽이’가 됐고 80년 광주항쟁 유인물 사건, 인천 5.3항쟁 등으로 3차례 구속되면서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며 젊음을 보냈다.

“나만큼 행복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그 시기의 고유한 사명이 있고 그것을 짊어져야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시대가 내게 요구했던 것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긍지가 있고 떳떳하다는 면에서 행운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죽쑤는 정치’를 보면서 ‘이 정권이 백성을 생각하며 정치하나, 책귀절로 정치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 더 잘 싸웠어야했다’ 라며 부끄럽고 창피하다고 말한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그는 ‘논어읽기’(2000), ‘하늘호수에 뜬 백편의 명시, 중국 한시편’(2002)를 출판했으며 지금은 인천민주화운동사를 정리하고 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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