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김민배 인천발전연구원장

인천발전연구원(이하 인발연)을 찾은 7일 오후. 연구원 입구엔 ‘경영개선 태스크포스(TF) 1차 회의’가 열린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인하대 김민배 교수가 12대 원장으로 취임한 지 꼭 2주 만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 인천시 싱크탱크인 인발연도 시장과 원장이 바뀌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폭과 깊이에 대해 김민배 원장으로부터 들어봤다.

스스로 이념좌표를 중도좌표로 분류했듯 지역내 소장개혁파의 대표적인 학계인사로 불리고 있는 그의 생각에서 인천시의 고민도 적지 않게 묻어났다.

30대 초반부터 줄곧 대학교수로 지낸 만큼 ‘원장’이란 호칭이 낯설 것 같았다. “교수가 훨씬 좋죠. 학교에서도 보직을 맡긴 했지만 우리는 교수가 본업이고, 나머지는 봉사한다는 의미의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학교를 휴직하고 연구원에 부임한 김민배 원장에게 “송영길 시장의 인사 가운데 가장 잘 된 인사란 평가가 나온다”고 건네자 “당연히 제가 후보는 아니었다”며 부임하게 된 이유를 풀어나갔다.

“송 시장은 연구원 기능에 대해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인천시 부채가 높아지는데도 인천시와 연구원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그 책임론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다.

그는 “선거 때는 (시장도) ‘설마’하는 생각이 있었고,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차원에서 재정위기론을 강조했

는데 인천시에 와 보니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임을 보고 받았다”고 시장의 심정을 대신 전달했다.

인천도시개발공사가 감자를 해야 할 정도로 부채가 높아갔고, 행정안전부도 기채를 승인할 리 만무하니 사업을 추진할 수도 없게 됐다. 송도국제도시의 상황도 녹록하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시민사회계에선 선거 이전부터 ‘재정이 위험하다’는 지적을 했다. 그러나 브레인이 모인 인발연에선 ‘경고(warning)’조차 하지 않았던 점은 일종의 직무유기였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발연의 인적 쇄신, 예산 삭감, 그리고 교수 출신 원장 부임 등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간 인발연 원장직은 공무원들이 자리를 채우는 식이었다. “김학준 원장 이후 10년 만에 교수 출신이 인발연에 왔다고 합니다. 원구원 사람들에겐 낯설겠죠”라며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김민배 원장에게 부과된 핵심 과제는 ‘그럼 어떻게 할까’이다. 인천시를 위해 인발연이 지향해야 할 바를 물었다.

그는 “연구원이 인천시와 시민을 위해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 비판적 목소리가 강하다”며 연구원 내부 뿐만 아니라 원장의 역량이 부재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연구원과 호흡하거나 다독이는 이가 없었고 개별 연구자의 실력은 뛰어날지언정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없었다는 것. 그 역시 평생 연구자로 지낸 만큼 일견 연구원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혹독한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그간 인발연이 인천시 전반의 과제를 천착하기보다 특정 부서의 요구와 정책을 뒷받침(Back-up)해주는 수준의 연구만 매몰돼 있었다는 판단이다. 또 일부는 본인의 관심사를 채우기 위한 연구를 진행한 것 같다고 했다.

“34명의 연구원 가운데 반 정도가 도시계획과 교통에 집중됐고, 반면에 교육·일자리·의료·문화 등 영역은 연구진이 부족하더군요.” 이같은 불균형 상황에서 인천시의 과제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올 리 없었다.

인천에서 학교를 나오거나 인천에 사는 연구자가 많지 않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래서 김민배 원장은 “인천대, 인하대, 가천길대, 재능대 등 1천500명 이상 교수들과 전문연구자가 있다. 연구원이 지역대학 교수들과도 외연을 확대하고, 지혜를 모으라”고 연구원에 설파했다. 연구원 내부에 온정주의가 팽배할 경우 내부 경쟁력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원의 독립성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게 김 원장의 판단이다. “무조건 인천시정에 따라 가선 안 된다. 연구자들이 확신을 갖고 연구에 임할 풍토는 조성하겠다”고 그는 강조했다.

시가 요구하는 연구를 수행하되 동원되지는 말자는 것이다. 경인아라뱃길 사업을 예로 든 그는 “경제성 분석에서 KDI는 1.26, 인천시 검증위는 0.12로 상반된 결과를 냈다”며 최악의 경우도 상정해 보고서에 담을 것을 요구했다. 인천시의 체질개선을 위한 동력은 바로 원구원에서 시작된다는 자부심을 갖자고 했다.

또한 연구원의 과제는 김 원장이나 연구원의 능력만으로도 풀 수 없다. 그래서 꾸린 ‘운영개선TF’에는 인천시 공무원, 시민단체, 지역대학 등에서도 참여했고, 조직원들과 함께 인사나 평가규정을 바꿔나간다는 구상이다.

연구원을 국책연구기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100명정도의 연구진이 필요하다. 인발연의 법정 정원이 63명이어서 인력보강이 필수적이지만 시 재정상황에서 예산이 만만치 않다.

당장의 해법으로 인발연이 주도한 ‘인천현안TF’를 꾸릴 예정이다. 지역의 시민사회계, 전문가 그룹과 네트워킹을 강화함으로써 현안을 풀어나간다는 구상이다.

“제 임기는 3년입니다. 그러나 1년 내에 연구원의 체질 개선이란 과제를 마친 뒤 다른 일을 하러 갈 것입니다.”

자신이 법학자라고 재차 강조한 그는 전문가로서의 ‘책임’, ‘양심’, ‘혼’이 연구원의 풍토로 정착될 경우 진정한 시정의 싱크탱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주변 '중도성향' 평가 속 본인은 '중도좌파' 규정

김민배 원장은

김민배(54) 원장은 지역 내에서 ‘좌와 우’와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로 꼽힌다. 그만큼 원만한 성품을 지닌데다 이념적으로도 편향됨 없는 중도성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진보쪽에 가까운 것 같고, 나 역시도 중도좌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신의 이념좌표를 진보로 규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민사회계와 진보진영에선 지난 6·2 지방선거에 앞서 김 원장을 진보단일 교육감 후보로 출마를 권하기도 했다.

지금은 송영길 시장을 위해 ‘봉사직’을 수행하게 됐지만 선거에 훨씬 앞서서는 지역의 오피니언리더로서 조언을 건넸다. “당신이 나와야 이긴다고 하던데 경선에 참여하라.” 여타 후보군들이 1년 전부터 뛰었던 만큼 ‘공평함’도 정치의 미덕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란 김 원장은 1977년 인하대 법학과에 입학한 뒤 줄곧 인천과 인연을 맺어왔다.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인하대에서 석·박사를 모두 마치고 바로 모교 교수로 부임했다.

두 차례에 걸쳐 법과대학 학장을 맡았고, 로스쿨 유치 당시에는 실무추진위원장을 맡아 모교에 로스쿨을 유치했다. 똑똑한 제자를 교수로 거둔 인하대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인천에 적을 두고 중앙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95년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만들어 의정감시센터 부소장을 3년간 지냈다.

비슷한 시기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돈 없는 젊은 교수와 약간 돈 많은 변호사들이 모여 법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점을 혁파하는 데 공부했다”고 했다.

연구회는 학자들도 법 해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 찼다고 한다.

1997년 월간 ‘말’지가 ‘한국을 움직일 진보인사 2천인’에 김민배 원장을 선정한 것도 이 같은 활동을 토대로 한다.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산업기술’이다. 자본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산업이 국경도 없이 사고 팔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07년부터 국가정보원의 산업기밀보호센터 자문진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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