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에 종사하는 근로자 중 불미스런 집단에 동조하기 위해 작업장을 이탈하는 등의 소란으로 해고된 근로자들의 명단을 별첨과 같이 통보하니 업무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78년 4월10일,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김영태 명의로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명단을 작성, 공문과 함께 각 사업장에 발송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조직적인 작성과 배포의 시발이었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80년 5월 한국노총 위원장실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블랙리스트 최초의 희생자들로 78년 4월 해고된 이들은 79년말까지 블랙리스트에 의해 30여차례 해고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7,80년대 해고 노동자들을 또 한번 깊은 좌절과 분노로 몰아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했던 블랙리스트는 ‘생존권을 박탈당한 노동자의 명부’, 바로 그것이었다.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산업현장의 민주화, 민주노동 운동에 대한 야멸찬 탄압이었다.

노동자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을 정권이 나서고 회사와 합작해 비인간적으로 봉쇄하고 방해하자는 것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노동자들은 아예 취업이 거부당하거나 일방적 해고통보, 전근(지방발령), 부당한 부서 이동을 강요당하거나, ‘빨갱이와 다름없다’는 정신적 학대 등 온갖 협박에 시달려 결국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 블랙리스트로 처음 해고당한 사례는 78년 9월 한일방직(인천 학익동), 대한모방(서울 영등포구) 등에서 해고된 동일방직 해고자들로 입사 2주~4개월 만에 해고당했다.

동일방직 해고자 가운데 79년말까지 블랙리스트로 해고된 사례만 32건에 달한다.




인천 산업선교회는 노동학교를 개설해 70, 80년대 지역 노동운동을 도왔다. 당시 ‘노동조합과 인간개발’을 주제로 화수동 인천 산선 사무실에서 외국인 강사가 강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사회복지선교회

(84년 ‘민주노동자 블랙리스트문제 대책위’ 보고서)
그후 지속된 ‘박해의 세월’에 동일방직 해고자 관련 건 외에 반도상사(부평구 효성동), 삼익가구(남구 도화동), 신도실업(부평4공단), 태평특수(부평4공단), 경신공업(주안5공단), 코리아스파이서(부평구 삼산동) 등 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가 이뤄졌다.

인천 외 원풍모방(서울 영등포구), 무궁화 메리야스(서울 동대문구), 태창메리야스(전북 이리공단), 쌍방울(이리공단), 동일섬유(이리시) 등지서도 같은 행태가 반복됐다.

그리고 5년여가 지나서 인천지역 해고자들은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해 정면으로 나선다.

83년 12월16일, 블랙리스트 해고자와 인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관계자 등 10여명이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 근로감독관실에서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83년 10~11월 김용자 김옥섭 안순애는 태평특수섬유에서, 서기화는 삼익가구에서, 신정희는 신도실업에서 각각 해고됐다.

김용자는 그때까지 8차례의 해고를 반복당했다. 이들은 해고 후 부당해고 구제신청과 진정을 통해 합법적인 해결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이들은 이때 노동자의 생존을 파괴하는 블랙리스트를 사회문제화 하지않으면 안되겠다는 자각과 함께 정부를 대상으로 투쟁을 계획했다. 그리고 12월16일 실행에 옮겼다.

첫 번째 농성에서 해고자 4명이 단식 및 철야농성에 들어가고 10여명은 주위에서 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농성 중 근로감독관 책상에 비치된 또 다른 블랙리스트를 발견,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조직적으로 작성하고 배포하고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려내는 성과를 얻는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2시 경찰이 투입돼 농성은 12시간만에 끝나고 10명이 연행됐다.




87년 7월 인천지역 해고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고노동자협의회 창립대회를 열고 현장 노동자들의 지원에 나섰다.

연행된 노동자들은 이틀 뒤 풀려났다. 그러나 서기화 김용자 김옥섭 김복자 안순애 신정희 등은 풀려난 날 다시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를 찾아 항의 농성을 벌였고 근로감독관 등과 실랑이들 벌이다 다시 경찰에 연행됐다. 정권은 이들 6명을 다음날 전격 구속했다.

이들의 농성과정은 실제 블랙리스트 문제를 사회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종교, 사회단체들이 잇따라 블랙리스트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집회, 시위를 집중적으로 벌여나갔다.

84년 3월 당시 정한주 노동부 장관은 야당의원의 질문에 “블랙리스트는 있을 수 도 없고 있지도 않다” 발뺌해야했다.

농 성 일 지

83.12.16 블랙리스트 해고노동자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당시 중구 자유공원 입구 소재) 근로감독관실 철야농성

12.17 새벽 2시 경찰투입, 10여명 연행

12.19 연행자 석방. 해고노동자 다시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 앞 농성.

12.20 농성 중 부상당한 서기화 병원서 연행. 동료노동자 노동부 인천지방사무소,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 모여 단식농성.

12.21 김용자, 김옥섭, 김복자, 서기화, 신정희, 안순애 등 6명 구속

12.27 구속자 가족, 동료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서 철야농성

84. 2.1 구속자 6명 석방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노동자의 낙인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는 70년대 초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78년 4월1일 동일방직이 124명의 조합원을 해고하고, 섬유노조가 그 명단을 조직적으로 배포하면서 사회문제화된 블랙리스트의 원조가 됐다.

블랙리스트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민주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당한 경우다. 이른바 ‘불순근로자 리스트’다. 동일방직이나 영등포 원풍모방 해고자 명단이 대표적인 경우다.

다른 하나는 당시 ‘도산계열리스트’로 불리던 것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의 명단이다.

노조활동을 하고 있거나 준비하거나, 앞으로 할 우려가 있는 사람으로서 산업선교회나 JOC 회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블랙리스트에 올려 사업장에 통보한다.

78년 4월 배포된 ‘동일방직 해고자 명단’의 경우 당시 섬유노조 김영태 부산지부장(79년 한국노총 위원장에 피선됨) 명의로 각 사업장의 사장과 분회장 앞으로 발송됐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본질적으로 정보기관과, 회사, 노동부 3자가 합작한 것으로 각 사업장, 노동부 근로감독관실 및 수사기관에 비치하고 있었다.

‘산자여 말하라:나의 형 최종길교수는 이렇게 죽었다'의 저자이며, 78년초 중앙정보부 경기지부에 노사담당관으로 부임했던 최종선은 동일방직 사태와 관련 2001년 3월 “블랙리스트는 (중앙정보부)본부에서 작성하고 관리 집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정부의 지시라고 판단 너무 억울해 문제화 결심

복직농성 해고자 서기화씨

“어느날 직급있는 사람이 사무실로 부르더니 경력서 좀 가져오라 하더군요. 순간 무슨 이야긴지 알아챘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 그날 밤 그는 만취해 친구들이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83년 10월24일, 서기화씨(50)는 가좌동 삼익가구에서 그런 식으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사직을 거부했지만 회사는 그 다음날 작업을 시키지 않고 대기시키더니, 일주일 째 되던 날, 일방적으로 대전으로 전출발령을 냈다.

그는 대전으로 갈 수 없는 사정을 자세히 적고 근로계약과 근로기준법 위반을 따지며 불가 이유서를 제출했으나, 회사는 ‘사명 불복’이라며 기다렸다는 듯이 해고시켰다.

그는 80년 10월 북성동 선창산업에 입사해 82년 7월 블랙리스트로 인해 처음 해고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기술을 인정받아 입사 8개월만에 조장이 되어 50여명과 함께 수출가구를 제작했다.

사장 딸 혼수가구도 그가 제작했다. 그러다 82년 6월 하순 어느날 과장이 느닷없이 불렀다. 서울로 전출가라는 것이었다.

거절하자 견습공 자리로 이동 시켰다. 일주일간 옥신각신하다 그 자리로 가게 됐는데, 이때 한 관리자가 하는 말이, 6월초 ‘외부’에서 연락이 와 그가 일꾼교회에 다닌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형사 2명이 집으로 찾아와 그를 연행해 당시 인천에서도 활동했던 김근태에 대해 묻고 협박했다.

이튿날 출근하니 회사는 징계해고 시키겠다고 했다. 그는 3개월치 위로비를 받고 사직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로 찍히면 회사에서는 무조건 잘라야했습니다. 회사에서도 내가 그런 인물이란 걸 알고 놀랍니다. 전두환 시절 노동운동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였으니까요. 겁줘서 내보내거나 안나가면 머리를 좀 써야죠. 이력서 허위기재라면 간단히 해고할 수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명령불복종이나, ‘입사 3개월 미만자를 정리한다’ 고도 하죠”. 그리고도 안되면 형사가 동원되기도 했다.

그는 78년 3월 성남에 있는 진선미가구에 입사해 79년 5월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4개월 만에 30여명의 해고자만 만들고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후 그는 친구의 소개로 인천산업선교회에 있는 일꾼교회를 다녔다.

82년에는 교우회 선교부장을 맡았는데, 이때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83년 12월, 노동부 철야농성에 대해 내부 이견도 있었는데, 나는 이 문제가 외부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사업장만 상대해서도 안될 것 같고, 교회에 호소하기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보다는 정부와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고 늘어져야한다고 했죠. 그래서 노동부로 간 것입니다. 너무 억울해 반드시 문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는 복직에 대해 뿌리깊은 ‘생각’을 갖고 있다. 87년 이후 판결에 의해서건, 정부에 의해서건 복직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게 그는 당연한 게 아니라 신기했다.

학생, 교사, 교수는 복직이 되도 노동자는 안됐다. 그는 노동자에 있어 복직은 ‘미완’이 아닌, ‘별개의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출소 후 85년 효성동 한일스텐레스에서도 3개월만에 해고당했다.

그리고 줄곧 인천에서 내장목공, 인테리어 등 ‘노가다’로 생활하며 현재 계산1동 전세집에서 살고 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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