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반문화사랑회는 지난 28·29일 이틀간 대구로 근대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다. 해반문화사랑회가 지난 2년간 벌여온 근대문화유산 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대구거리문화시민연대와 함께 진행했다.

조선시대 대구 교통의 요충지이자, 민족운동가의 산실인 중구 계산동을 출발해 성 밖 골목, 약전골목, 염매시장골목, 진골목, 종로화교거리, 서문로, 시장북로, 인교동을 거쳐 달성토성까지, 대구의 골목길을 누비며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봤다.

대구 중구 계산동은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옛날 대구 신천을 끼고 형성된 동네를 말한다. 일제시대 명치정으로 하였다 해방 후 계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계산동은 부산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근대 민족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민족운동가 서상돈이 계산 2가 88번지에서 태어났고, 민족시인 이상화가 84번지에서, 민족운동가 이효상은 108번지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정은 90번지에서,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은 82번지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현진건, 박태준, 박태원, 이인성, 서동진 등 예술가의 산실이기도 하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택은 인근에 주상복합건물을 짓고 있는 군인공제회가 사들였다. 복원 공사를 한 뒤 대구시에 기부 채납할 계획이다.

약전골목이라 불리는 약령시는 2004년 한방특구로 지정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골목이다. 한의원과 한약방 등 한약관련 가게만 1천여 개에 이른다.

원래의 장터를 잃어버린 약령시(장)가 대구 남성로 일대와 종로 등지에서 열리면서 1910년경 약령시장으로 남성로에서 상설화된다.

1905년 경부선 대구역이 설치되면서 영남권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서문시장과 함께 민족자본을 형성한 주요한 잉태지가 된다.

남성로에는 주로 약재상들이 자리 잡고 주변 골목에는 객주와 거간들이 묵어가는 여관, 마방, 주점, 요정 등이 자리 잡았다.

1900년 상인이 1만 명에 이르렀고, 거래액만 100만 원 이상일 정도로 엄청난 시장이었지만, 1910년 조선총독부의 약령시통제로 침체기를 맞는다.

이후 1980년대를 지나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된다. 2000년 110억 원을 들여 약령시 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제는 매년 27만 명이 다녀가는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경상감영의 정문 ‘영남제일관’, 한약박물관인 ‘약령전시관’, 남성로의 명소 ‘구 대남한의원’, 동양3국에서 유명한 거상 ‘김홍조건재약방’, 3대를 잇는 ‘고려인삼사’와 ‘대구지물상사’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영남지역 최초의 교회인 제일교회 예배당도 약령시 안에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30호로, 예배당과 종탑건물은 계산성당 다음으로 대구에서 유명한 근대건축물이다.

약령시를 벗어나 남일동으로 가면, 부자골목이라 불리는 진골목이 있다. 진골목은 경상도 말씨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기원하는데, 긴골목에서 진골목이 된 것이란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골목으로 현재의 종로 홍백원 우측골목에서 중앙시네마 뒤편 길을 통해 국일따로국밥 왼편 길을 지나 경상감영공원으로 이어지던 길이다.

부자골목으로 유명한 진골목의 근대초기 최고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달성 서씨들은 고려시대부터 현재의 도심지 중구 일대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서병국을 비롯해 방계 형제인 서병직은 정소아과, 그의 형이면서 이인성과 함께 활동한 서병기, 국채보상회 간부로 활동한 서병규 등을 비롯해 부자 서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달성 서씨 이외에도 약전골목에서 당재와 초재를 거래하며 벼락부자가 된 김성달의 저택이 진골목에 있고,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회장, 연간 2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의 집 등 근대 100년간 대구 부자들의 거처가 대부분 진골목에 있었다.

일제시대 대구 최고의 부자 서병국의 저택은 현재 대구화교협회가 쓰고 있다. 적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목재는 금강산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화교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이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이들 화교들이 있는 곳이 종로다. 1905년 처음 화교가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04년 경부철도가 개설되고, 조선시대 3대 시장이 형성된 곳이 대구였기 때문에 화상들이 정착한 것으로 파악된다.

상업 이외에 건축업자들도 대거 대구로 몰려들었다. 구 종로호텔의 전신인 군방각, 구세군교회, 대구 부자 서병국의 저택 등 종로 건물의 대부분이 화교 건축가의 손을 거쳤다.

일제시대 최고의 수타면 청요리집이 종로에 있었는데, 현재는 쎈추럴 관광 호텔이 들어서 있다.

종로는 기생거리로도 유명하다. 일제시대부터 기생을 훈련시키는 사설학원인 달성권번을 비롯해 기생들이 파견되는 요릿집과 요정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돈 많고 권력 있는 동네유지들이 자주 드나들어 ‘종로에서 돈·감투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인이 세운 대구 최초의 극장인 만경관도 종로에 있다. 이 극장앞 도로는 ‘국채보상로’라 불린다. 만경관 뒤편 골목에는 해방 후 월북한 뒤 조선실록을 번역한 사학자 김석형과 광야를 지은 민족시인 이육사 등이 살았다고 한다.

종로를 지나 현재 대구중부경찰서가 있는 서문로 일대는 일제시대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대구에서 일제시대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으로, 백화점인 무영당을 비롯해 조선식산은행 등 근대건축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학교주 최제우 나무가 종로초등학교 안에 있고,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어릴 적 신문팔이를 지낸 영남일보 사옥(현재 서문로소방파출소)도 있다. 박정희가 군사구테타를 모의한 밀실 요정 ‘청수원’도 종로에 있다.

길 건너편 서성로는 특히 순댓국밥집이 유명한데,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을 돼지골목으로 부른다.

경남권에서는 돼지국밥에 부추를 즐겨 넣어먹는데, 돼지국밥의 원조 밀양의 이름을 딴 ‘밀양식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고향 합천을 방문할 때 300인분을 주문했다고 전해지는 ‘8번식당’, 전통 순대수육이 일품인 ‘이모식당’이 있다.

일제시대 삼성그룹을 낳은 국수 상회인 ‘삼성상회’가 또 인근에 있다. 삼성상회가 있던 건물은 5평 남짓한 사무실과 작은 공장, 전화기 한대, 국수기계, 직원 40명 정도가 일했던 공간이다.

1934년 목조 4층으로 지어 사용하다, 1999년 현재의 삼성상회 야외박물관을 짓기 위해 허물었다. 2000년 말 삼성상용차의 부도처리로 지역에 수천억 원의 부도액을 안겼다. 삼성불매운동 등 지역의 여론이 나빠져 훼손당했다가 2001년 다시 문을 열었다.

대구 중구에는 중구 일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동산이 있다. 현재 동산병원과 제일교회에서 분리된 동산제일교회가 있다.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와 동산병원을 설립한 존슨 선교사들이 달성 서씨 문중의 학자로부터 1899년 동산일대 땅을 사들였다. 이곳에 제중원(현 동산병원)과 미션스쿨(선교학교) 등을 세웠다.

1997년 동산병원 100주년을 기념해 선교사 스윗즈, 블레어, 챔니스 등이 사용했던 주택 3채를 의료선교박물관을 개장했다. 20세기 선교사들의 삶의 자취와 아름다운 서양식 정원을 볼 수 있다. 웨딩촬영 영화로케이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인근 동산맨션의 오른쪽 방면에 오르막계단 90개가 있다. 이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소담한 골목으로 가을 정취를 만끽 할 수 있다.

이 길은 동산병원을 관통하고 있는데, ‘대구 3·1운동길’이라고도 부른다. 3·1운동 당시 계성, 신명 등 미션스쿨과 대구고보 학생들이 동산병원 솔밭사이에 집결해 서문시장 큰 장터로 몰려갔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빈처’를 쓴 소설가 현진건의 산책로였다고 전해진다.

선교사 스윗즈주택 왼편에 사과나무가 서 있는데, 선교사들이 1899년 미국 미주리 주의 한 육묘장에 주문해 가져다 심은 것으로 대구 능금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김주희기자 juhee@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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