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서예와 동서양 미술을 가로지른 명필.’
검여 유희강을 설명할 때 붙는 수식어다.

검여의 고향인 인천이나 한국의 미술사에서 그의 예술혼에 대한 찬사가 풍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가계를 정리해 놓는 일에는 미흡했다.

올해는 추사 김정희의 150주기이자 추사 이래 최고 서예가로 평가받고 있는 검여 유희강의 30주기를 맞는 해이다.

(재)인천문화재단(대표이사·최원식)은 그의 30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와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 과정에서 이희환 인하대 강사는 검여의 가계와 생애를 구명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작가론의 출발을 열었다는 평가다. 내주에 있을 전시와 심포지엄에 앞서 검여 유희강의 궤적을 정리해본다.

1. 성장기 : 1세(1911)~28세(1938) “전통과 근대의 조우”

검여 유희강은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부평군 석곶면 시천리(오늘날 인천시 서구 시천동) 진주유씨 가문인 부친 유성무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28일 만인 6월 21일에 부친이 작고한 탓에 유희강은 백부 정무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다.

백부 정무는 시문에 능했고 유학의 전통을 끝까지 지킨 선비로 평가된다. 일본인들의 국권 간섭을 배격하기 위해 신학문의 폐해를 지적하는 등 민족주의 의식이 확고했다. 즉, 검여의 집안은 나라를 근심하는 재야의 선비가문이었다.

백부의 영향으로 유희강은 근대학문보다는 유학의 전통이 살아있는 문풍 속에서 그의 예술적 자질이 길러졌다.

백부가 사망한 1926년, 16세가 된 검여는 3살 연상인 이옥종과 결혼했다. 동시에 근대문물을 배우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경성의 학교에 다니고자 삭발을 결행했다. 단발령 때문에 군수자리를 사임했던 조부가 있었던 탓에 검여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어도 웃어른이 응하지 않았고, 또한 상투를 틀고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1934년 곡절 끝에 명륜학원을 선택, 근대학교에 들어갔다. 1937년 3월 졸업할 때까지 만 3년간 수학했다. 유희강의 명륜학원 재학시절은 완고한 전통의 세계에서 학문과 체험을 통해 근대와 본격적으로 대면하는 시기였다.

전통의 공간이었던 시천리의 완고한 전통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근대세계에의 매혹과 불안을 감득했던 것이다.

검여는 제도화된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며 새로운 생을 모색한다. 명륜학원 졸업과 함께 경성 기독교청년회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다니면서 중국 유학을 꿈꾸었다.

2. 중국행 : 28세(1938)~36세(1946) “8년간의 중국행과 예술과의 만남”

1938년 3월 경기기독교청년회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한 검여는 한 달 후 바로 중국 유학길에 올라 1년간 북경 동방문화학회에서 중국서화 및 금석학을 연구했다. 이로부터 1946년 4월 귀국하기까지 만 8년동안 중국에서 체류했다.

유희강이 순수하게 유학을 한 기간은 동방문화학회에서 배운 1년간과 1943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남창시립도서관 지도관 위촉으로 근무하면서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1년 8개월 정도가 전부이다.

나머지 5년여의 시간을 검여는 어떻게 지냈는가? 검여는 중국 언론사에서 견문과 식견을 높여나갔다. 1939년 5월부터 ‘한구무한보(漢口武漢報)’의 총리처 주임으로 1년 5개월간 근무했다.

북경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호북성의 무한시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한구무한보’는 상업중심지인 무한시의 한구에서 발간된 지역신문이다.

1940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는 강서성에 있는 ‘남창민보(南昌民報)’에서 편집기자로,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2월까지는 ‘강서시보(江西時報)’의 편집국장 겸 ‘강남민보(江南民報)’의 편집기자로 일했다.

한편, 중국에서 함께 어울려 지낸 윤광진 옹은 검여가 임시정부의 밀사 역할을 한 점과 1945년 김구 주석이 귀국할 무렵 남창으로 유희강을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유학, 언론사 근무 이외에 1945년 10월부터 1946년 4월 귀국하기 전까지 광복군 주후지대장의 비서로 근무했던 이력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오래한 것은 아니지만, 후배 우문국에 따르면 서예전이나 동양화전은 빼놓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3. 우수기 : 36세(1946)~58세(1968) “인천 문예부흥을 위하여”

8년 만에 귀국한 검여는 1946년 5월 중순에 시천동 고향집에 당도했다. 챙기지 못했던 가정을 돌보는 한편, 예술 활동을 위한 모색을 시작했다.

1947년 문맹퇴치를 위한 민간교육기관인 인천성인교육회 서곶지부에서 교육부장을 맡으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이 해에 장녀 소영이 출생, 연년생으로 1948년 차남 신규가 출생했다.

1949년 8월 창립된 인천예술인협회에서 총무부장을 맡았고, 1950년 2월에는 미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서양화 작업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에는 인천예술인협회를 모체로 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지부(약칭 ‘인천문총’) 미술부문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검여의 예술활동은 계속됐다. 1951년 인천문총 제1회 예술제전으로 개최된 전시(戰時)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문총 인천지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검여는 그의 학식과 인품으로 인천 문화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는다. 1954년에는 이경성에 이어 제2대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취임, 7년 여간 재직했다.

1959년은 검여의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문화활동을 전개한 해로 기록된다. 10월 인천 은성다방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 그동안 연구한 여러 서체를 화려하게 펼쳐보였다.

그리고 인천 문화유산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술로 평가되는 ‘인천의 안내 : 고적·명승·천연기념물’을 편찬, 발간했다.

1962년부터 문화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서예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인천교육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서울 종로 관훈동에 검여서원을 차리면서 중반기 예술활동은 정점을 향해 고양한다.

4. 좌수기 : 58세(1968)~66세(1976) “병마를 넘어선 좌수서의 경지”

1968년 9월 7일, 회갑을 몇 년 앞둔 검여에게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뇌출혈로 인한 실어증과 우반신이 마비, 서예가로서는 치명적인 오른손 마비가 온 것이다.

수원 영화동 농가에서 요양치료를 받기 시작해 5개월째부터 의식을 회복했으나 오른손의 기능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다시 그는 왼손으로 글자 연습을 시작, 좌수서로서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 간다.

1971년은 검여의 생애에 있어 잊을 수 없는 해다. 그를 아끼는 작가, 문인 및 기타 저명인들이 발기가 되어 회갑기념으로 제3회 개인전을 좌수서 작품만 가지고 신세계 화랑에서 성대하게 개최했다.

발병 전 작품에 못지 않은 좌수서의 개성적이면서도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 해에 검여는 서울특별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했다.

1975년에는 제5회 개인전 ‘검여 유희강 좌수전’을 개최했다. 검여 좌수서의 마지막 진경을 펼쳐 보인 개인전을 기념, 발병 이전의 우수서를 모아 첫 작품집 ‘검여유희강서예집’ 제1집이 일지사에서 출간됐다.

1976년 10월 17일 새벽, 겸여는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 향년 65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1녀를 남기고 고향 시천동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오류리에 묻혔다.

“원칙에서 출발하여 또 하나의 원칙을 만든 추사처럼 그도 가장 자기 체질에 알맞은 서체를 발굴했을 것이고, 선인의 기술과 기지 위에 자기의 개성을 구축했을 것이다.”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이경성 선생의 검여에 대한 평가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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