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천년전 비단을 서방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화상(華商)들은 황량한 모래사막위에 길을 냈다.

시안(西安)을 출발 고봉준령의 텐샨산맥, 파미르 고원을 넘어 터키의 이스탄불, 로마까지 연결되는 긴 여정.

낙타에 희망을 싣고 기약도 없는 험난한 여정을 나선 캬라반의 행렬들은 어떤 유산들을 남겼을까.

실크로드는 대상들이 비단만을 거래하던 단순한 교역로로서의 의미를 떠나 동서양을 잇는 문화와 문명 그리고 삶이 소통하는 대동맥이었다. 그 길을 통해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이 전파되고 불교와 이슬람교 서역의 문물이 건너와 새로운 문화로 융합되고 생성되며 발전을 이뤄왔다.

그 중 한 갈래인 북쪽 루트를 통해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는 중국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번성하게 되었고, 중국문화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 위대한 예술로 꽃을 피웠다.

실크로드 곳곳에는 그 흔적들이 황폐한 모습으로 혹은 오랜 세월을 간직한 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상해를 출발 란저우를 거쳐 쿠얼러 쿠차 우루무치까지 중국 실크로드 구간을 답사하는 새얼문화재단 역사기행을 동행, 불교유적과 문화유산들의 자취들을 따라가봤다.

글 싣는 순서

1. 중국문화의 집적체 상해박물관
2, 서안과 서역을 연결하는 무역도시 란저우
3. 위대한 문화유산의 보고 둔황(1)
4. 위대한 문화유산의 보고 둔황(2)
5. 사막속의 분지 투르판
6. 서역의 통로 쿠얼러
7. 고선지장군의 숨결이 잠든 쿠차
8. 동서교역의 요새 우루무치(1)
9. 동서교역의 요새 우루무치(2)
(중국지도에 노선도 첨부)



 

중국 수년천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곳. 10만여점의 진귀한 문물들이 중국 고대사회로 인도하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4개층으로 청동기·도자·회화의 3개 분야로 나뉘어져 전시되고 있는데 청동기관 도자기관의 유물들은 황하문명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청동기관에 들어서면 유물의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한다. 기원전 4천년 적게는 2천년전 옛사람들이 그토록 대단한 미적 감각을 지녔다니 자못 놀라웠다.

황하문명은 양사오(仰韶) 문화와 그로부터 발한 룽산(龍山)문화로 대별된다. 양사오문화의 대표작으로는 채도(彩陶)를 꼽는다.

채도란 도자기에 무늬를 그려 넣고 채색을 한 도자기를 일컫는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민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의 소박함과 극히 대조되는 색과 곡선을 보여준다.

곡물과 물을 저장하고 이동하는 수단인 실용 토기 표면에 동물문양이나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그 세련됨이란 과히 예술적이란 말로 표현 할 수밖에 없다.

동양문화를 비하하던 서구가 황하유역서 채도가 발굴되면서 비로소 황하문명을 인정했다고 한다.



 

토용(土俑) 토우(土偶)등 재미나는 유물들도 눈길을 끌었다.

룽산문화는 청동기문화로, 중국에 실재했던 최초 왕조 은나라를 상징하는 문화다. 이후 청동기문화는 주나라,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진한시대까지 무려 1천500년 동안 발전한다.

주조품들은 쓰임새에 따라 솥 물병 포도주 주전자 등 다양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무게가 1t이나 되는 네모난 세발솥은 웅장함을 자아냈다. 어떻게 청동을 녹여 거대한 크기로 빚어냈는지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청동기의 외형엔 사자, 용, 봉황, 귀신의 얼굴과 같다는 귀면무늬를 상징적으로 새기고 주변에는 물결무니나 기하학적인 문양들을 배합했는데 전체적인 입체감과 정교함이 신비하기 그지없다.

대부분 왕들이 제사 때 사용하는 제기로 쓰였다는데 크기와 화려함은 소유자의 권위에 따라 더해졌다 한다.

청동기 안쪽에는 금문을 남겨 소유주 제작연대와 용도 등을 기록해 전하고 있다.

시간을 재촉하는 발길을 한동안 머물게 한 것은 타악기인 편종이었다. 서주시기부터 주종했다고 하는데, 종을 크기별로 세분화해서 긴 나무막대에 매달아 기둥을 세워 고정시켰는데, 그 종의 숫자와 길이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종의 크기와 치는 강도에 따라 음색을 달리하고 장엄하고 깊은 음색부터 날렵하고 청아한 음색까지, 서로를 조화시켜 화음을 연주했다. 그 화음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나라는 편종을 송나라에서 수입해서 연주하다 세종 때 이르러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한다.

도자기관에 들어서면 우선 방대한 물량에 놀라게 되고 한 점 한 점마다 다양한 형태와 빛깔을 지니고 있어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예술을 향유하던 옛사람들의 높은 안목이 엿보인다.

양사오문화의 채문 토기는 당나라 시대에 당삼채(녹색 갈색 남색을 배합한 당나라 자기) 등으로 발전하는데 우리나라 도자기의 소박하고 간결한 멋과 달리 우아함과 화려함을 지녔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빚은 몸체에 섬세한 솜씨로 채색한 한 폭의 그림, 문외한이 언뜻 보아도 이채로웠다.



 

작품들마다 그 시대 도공들의 예술혼이 숨쉬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은 눈을 떼지 못한 채 조용히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서화는 원(元) 명(明) 청(淸)대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각 시대마다 독특한 화풍을 구사, 특징을 따라 감상하다보면 역사적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낭만적으로 때로는 거침없이 또 때로는 절제의 미학으로 그 시대의 삶과 문화가 개성적인 사유의 공간 안에 머물러 있다.

불상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신체의 비례 풍만함의 정도, 법의에 흐르는 주름의 형태, 광배(불상 뒤에 빛을 나타낸 장식)의 모습이 달라진다.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호방한 모습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수나라 당나라의 불상들은 세밀하고 정교하며 풍만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전 시대의 좌우대칭의 자세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유연하다.

이 불상양식들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우리만의 특색이 다시 입혀져 독창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한다.
글·사진=유승희기자ysh8772@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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