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김경인 화가/인하대 명예교수

‘소낭구’의 화가 김경인 인하대 명예교수(69)는 요즘 20년간 매달려 왔던 소나무 그리기 작업에서 나아가 ‘색채 해방’을 꿈꾸고 있다. 그동안 색채는 소나무 그림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색채를 중심으로 해석하자는 생각에서 색채 해방에 천착하기로 했다. 한번 매달리면 뚝심을 갖고 꽤 오래 끌고 가는 그는 색채 해방이란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2년간이나 고민해왔다.

젊은 시절이던 70년대 ‘문맹자’ 시리즈로 시대 상황을 그림을 통해 비판하고 제3그룹 결성으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불을 지폈던 그는 제6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고 인천민예총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인하대를 퇴임한 후에는 당진에 작업실을 짓고 조용히 작품활동에 매달리고 있지만 그는 다시 인천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 어렸을 적 꿈이 서리고 25년간 인하대에 몸 담으면서 즐겨 찾았던 신포동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 신포동 주변에 작업실을 꾸미고 싶어한다. 그는 인천에 작업실이 마련되면 이 곳에서 색채 해방에 정진할 생각이다.

그는 “인천은 좋은 화가가 많이 배출됐고 인구가 28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가 됐는데도 미술관이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라며 “인천에 미술관이 지어지면 개인 작품을 모두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근황을 말씀해 주시죠.

-2007년 인하대 퇴임 후에 어렸을 적 자랐던 당진 아미산 자락에 조그만 화실을 마련해 그림 작업을 하고 있

습니다. 아주 조용한 곳이지요. 처음 화실을 낼때 이 곳에 조용한 예술인촌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원로 음악가나 미술인, 탤런트 9명을 불러 모았는데, 이 분들이 동의한 후 땅만 사고 내려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아직 예술인촌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1주일에 하루 정도는 인하대에서 강의하기 위해 인천에 옵니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인천은 태어나서 10년간 자라고 25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했던 곳입니다. 특히 신포동 일대는 어렸을 적 추억이 서린 곳이고, 교수 시절에도 자주 찾았던 곳이지요. 지금은 낙후된 이 곳이 예술인 창작공간인 아트플랫폼이 들어서면서 예술적인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 재직시절에도 신흥동 옛 창고건물을 개조해 개인 창작공간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곳에 개인 화실을 내고 싶습니다. 작년부터 제자들을 통해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고 있는데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내년에는 꼭 마련할 생각입니다.

인천에 돌아오면 하고 싶은 일은.

-역시 작품 활동에 매달려야 겠지요. 그동안에는 20년간 소나무에만 매달려오다 최근에 색채 해방이란 새로운 소재를 찾았습니다. 여기에 매달릴 계획입니다.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내년이나 내후년쯤 색채 해방을 소재로 한 작품 개인전을 열 생각입니다.

그리고 문화예술계 인사, 후배들과 인천에 미술관 건립운동을 펼쳐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은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아직 미술관이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지요. 인천에 미술관이 지어지면 개인 작품을 모두 조건없이 기증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 평가를 받더라도 일반인들에게 팔리는 작품도 아니고 미술관에서 소장, 전시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인천민예총 창립을 주도하고 제2대 인천민예총 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요.

-82년도에 인하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했을 때 고향인 인천의 문화기반이 취약해 불모지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제 광역시가 돼 인구가 280만명에 육박하는데도 아직 미술관 하나 없쟎아요. 음악대학도 없구요. 인천은 문화예술면에서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문학과 이가림 교수와 함께 인천민예총을 창립했는데, 2대째 회장을 맡았다가 중도에 그만뒀습니다. 회장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인천의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문화예술 발전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데 제대로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인천이 독자적인 예술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 보시는지.

-서울 예속적인 면이 강했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예술인을 키워낼 수 있는 독자적인 문화 기반이 취약했던 것이지요. 지금은 서울의 경우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은 아직도 미술관이나 뮤지컬 공연장이 없을 정도로 기반 면에서 취약한 상태지요.

인천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면 대표적인 예술분야를 키워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민들의 문화 향수 기회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로드맵도 만들어야 하구요. 시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더 적극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죠.

-역시 예술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겠지요. 인간은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니까요. 그림속에서는 모두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붓을 잡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소외되더라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살 수 있는 분야입니다. 사회가 너무 합리적으로 변하게 되면 예술은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젊은 시절 시대 상황을 비판했던 ‘문맹자’ 시리즈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74년도에 젊은 친구들과 ‘제3그룹’이라는 화가 동인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때 나온 작품입니다. 이전에는 한국미술사에서 시대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린 작품이 없었고 시대상황을 정면으로 고발한 작품은 문맹자 시리즈가 처음이었지요.

당시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많은 고초를 당했는데,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이 때 같이 활동했던 임옥상, 민정기, 신경호, 백수남 등은 후에 80년대 한국화단을 풍미했던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시대상황을 비판의식을 가지고 담아내는데 그쳤지만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민중미술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민중미술이 후에 정치화하는 경향을 보여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사회비판적인 화가에서 나중에 ‘소낭구’의 화가로 변신하셨는데.

-화가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를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중미술이 한국화단을 주름잡던 80년대에 저는 한국의 정체성 찾기, 뿌리 찾기에 나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그림작업은 개인적인 창작활동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무리 지어 예술활동을 하는 민중미술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산수화, 문인화에는 어김없이 소나무가 등장하는데, 등장하는 소나무는 모두 산수화를 돕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맞는 소나무의 정형성을 찾자는 생각에서 20년간 매달리게 된 것이지요. 소나무는 100년이 넘어야 멋이 나오고 곡선이 절묘해 예술적인 조형성도 뛰어납니다. 93년도에 처음 소나무 전람회를 연 뒤 2004년까지 5번 정도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소나무를 찾아다니고 연구한 것까지 합하면 20년간 소나무에만 매달려온 셈입니다.

최근에는 색채 해방에 전념하고 계신 것로 알고 있는데.

20년간 소나무 형태만 좇아 다녔는데 색채는 소나무를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새로운 작품 방향을 찾기 위해 2년간 고민을 해왔는데, 최근에야 고민이 해결됐습니다. 이제는 형태가 아닌 색채 중심으로 해석하자는 의미이지요. 앞으로의 작업은 색채 해방을 표현하는 그림이 될 것입니다.

후배 화가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최근 젊은 화가들 중에는 재주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정신적인 면이 약해 보여 아쉬움이 많습니다. 지나치게 해외미술 조류를 쫓아 다니는 경향도 강하구요. 예술인들은 한국 정체성과 민족의 정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글= 구준회기자 jhk@i-today.co.kr 사진= 황경진기자 ssky0312@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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