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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2월 15일 일간지 재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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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화운동사(2편)-김병상신부 구속사건
글 싣는 순서

1. 동일방직 사건(72.2~)
2. 김병상 신부 구속 사건(77.8)
3. 인하대 유신철폐 시위 사건(78.11~)
4.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83.12)
5. 인사련 창립과 반독재 민주화운동(84.11~)
6. 민주노조 운동과 노동운동 탄압(85.2~)
7. 5.3 인천항쟁(86.5)
8. 인천의 6월 항쟁(87.6)


74년 1월부터 75년 5월까지, 유신정권은 1호부터 9호까지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연이어 발동했다.

그 긴급조치권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행위를 금지해 헌법의 개정 주장과 제안마저 못하게 했고, 법을 바꾸자는 논의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구속할 수 있게 했으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정상적인 정치 의사 표현행위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것이다.

77년 8월28일 유신체제가 그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기, 김병상 신부는 유신헌법의 철폐를 조금도 거리낌없이 웅변하며 신자와 시민들에 절박한 민주주의를 호소하다 구속됐다.

김병상 신부 구속사건은 함세웅 신부 등이 구속된 1976년 3.1 명동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때 함 신부 등의 구속에 항의해 전국적으로 특별기도회를 열어나갔다.

77년 구속 당시 인천교구 총대리요, 부교구장으로 있었던 김병상 신부는 74년 결성 초기부터 참여해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으로 유신체제에 맞서 민주화를 위한 시대적 소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인천교구 주교좌 성당인 답동성당에서 8월28일 열린 특별기도회는 주보와 특별포스터를 통해 20여일 전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기도회에는 인천은 물론 전국 각 교구에서 모인 사제 80여명과 신자 2천여명이 참석했다.

강론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맡았다. 미사를 끝내고 2부 순서 때, 3.1명동사건으로 구속된 함세웅 신부의 상고이유서가 낭독됐다.

김병상 신부는 이때 가톨릭회관 외부벽에 신포시장과 동인천을 향해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미사 내용이 성당 밖 시민들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유신헌법 철폐’, ‘언론자유 보장’이 적힌 현수막을 본당 사제관과 가톨릭회관 벽에 각각 내걸었다.

김 신부는 또 지학순 주교의 강론과 함세웅 신부의 상고 이유서 ‘나는 왜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가?’를 담은 유인물 500매를 제작, 미사 중 배포했다. 긴급조치를 심히 위반한 사건들이었다.

9월3일 새벽 4시30분, 유신정권은 기도회를 주관한 김병상 신부와 황상근 신부(당시 도화동교회 주임사제)를 연행했다.

황 신부는 그날 저녁 풀려나왔으나, 김 신부는 오후 5시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김병상 신부가 구속되자 김 신부의 석방을 요구하는 활동들이 천주교계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이틀 뒤인 9월5일 답동성당에서 사제 40여명과 신자 1천200여명이 모여 기도회를 열고 구속된 양심수와 김 신부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천교구는 9월11일부터 김 신부가 석방될 때까지 날마다 오후 6시에 답동성당에서 합동 미사를 거행키로 결의했다.

9월12일에는 다시 답동성당에서 김병상 신부를 위한 특별 미사가 열렸는데, 이날 기도회에는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와 지학순 주교, 사제 약 70명과 신자 1천100여명이 모였들었다.

이날 기도회가 끝난 후 김 신부와 함께 1969년에 서품을 받은 15명의 전국 동창 사제가 인천교구 가톨릭회관에서 1주일 동안 단식기도에 들어가 교회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일에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도 단식기도를 이어나가기로 뜻을 모으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김병상 신부의 구속에 항거하고 석방을 촉구하는 양심적인 목소리가 드세지자, 검찰은 9월17일 불기소처분으로 석방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명동사건

지학순 주교 구속 계기로 출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한 직접적 계기는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었다.

지 주교가 74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반정부 시위 주모자 가운데 한명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자 사제들이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74년 7월23일 지 주교는 구속됐고 정의구현사제단은 9월26일 결성됐다.

사제단은 긴급조치에 맞서 민주회복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를 명동성당에서 열었다.

사제단은 단순히 지 주교 석방만을 요구한 게 아니라, 유신정권을 반대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교회는 “기본권이 짓밟히고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유린당한 권리 회복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밝혔다. 김병상 신부는 89년부터 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긴급조치 9호 발표 후 9개월여 후인 76년 3월1일, 민주화 진영은 명동성당에서 각계 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구국선언은 긴급조치의 철폐, 투옥 인사와 학생의 석방,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을 촉구했다.

정권은 이들에 대해 정부 전복 선동 혐의로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함세웅, 김승훈, 이문영 등 18명을 기소했고, 법원은 관련자 전원에게 2~8년씩 실형을 선고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철저한 응징·고립화 국민 민주화의지 꺽어

인터뷰 - 김병상 신부


“정권은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조선시대 어명을 거슬이는 것 만큼, 반역죄 다스리듯 무섭게 응징했습니다. 구속되면 위문도 못하고, 그 부모를 위로해도 잡아갔습니다. 철저히 고립시키는 겁니다. 감옥에서도 그들은 타인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시켰습니다.”

김병상 신부는 긴급조치 시대, 박정희 정권은 그 위반자에 대해 철저한 응징과 고립화로 국민의 민주화의 의지를 꺽었다고 지난 1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특별기도회가 있던 날 ‘유신헌법 철폐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라 쓴 현수막을 사제관에 하나, 가톨릭회관에 하나 길게 걸어놨고 동인천역과 신포시장을 향해, 시민들이 기도회와 강론을 들을 수 있게 대형스피커를 달아놓았어요”.

그는 강론 중 기관원들이 단단히 동여맨 현수막 줄을 끊지 못해 안달이었다고 기억한다. 김 신부는 그만큼 완벽히 준비를 하고 이날 기도회를 맞았던 것이다.

“정면으로 대항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범법행위’를 하고 감옥에 들어가니 긴급조치 위반이 대단한 일이었구나를 새삼 알게됐을 만큼 고립감을 느끼게했습니다. 누구도 다가올 수 없게 격리시키고 감시했죠. 정권이 나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피부로 알게된 거죠”

“신부가 구속됐는데, 진작 들어와야 했구나, 신자 대신 할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네가 무슨 충성이냐’라는 바깥의 냉소 어린 눈초리가 교차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재 답동성당에서 몬시뇰로서 교회일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면 NGO 지도자로서 활동가들을 뒷받침하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에서 물러나 지금 고문으로 있는 그는 90년대 들어 목요회 회장,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모임’ 상임대표 등 중요 역할을 맡아 초기 인천지역 시민운동의 지도자로서 길을 열어왔다.

지금도 실업극복국민운동인천본부 이사장 등을 맡아 소외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70년대 종교단체와 민주화운동


긴급조치로 점철된 엄혹한 70년대 정치 사회 현실에서 종교단체와 시설는 독재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인천에서도 독재의 탄압 속에 ‘민주’와 ‘인권’, 노동자의 생존권 등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싸운 종교단체의 족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도시산업선교회(산선)는 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함께하는 목회자 프로그램으로서 산업현장의 노동자의 삶과 민주적 질서를 위해 노력했다.

인천 산선은 61년 4월 조용구(주안교회), 윤창덕(내리교회) 목사가 동일방직과 한국기계공업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하면서 탄생했다.

인천 산선에는 같은 해 미국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산업선교 훈련을 받은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가 부임해 활기를 띤다.

오글 목사는 66년 시흥 군자면 달월교회에 조화순을 찾아 ‘노동자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노사관계에서 노동자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설득한다.

조목사는 결국 오글 목사(75년 추방된다)의 훈련을 받고 산선 총무로 66년 11월 동일방직에 6개월간(규정에 따라) 취업해 활동했고 71년 동구 화수동 인천 산선 회관에서 일꾼교회(당시 노동자교회)를 개척했다.

72년에는 조승혁 목사가 동일방직,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 노사분규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인천 산선은 그 후에도 JOC와 함께 ‘빨갱이’라는 흑색선전과 불법적인 압수 수색을 당하는 등 탄압 속에서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을 지원하고 영세주민의 권익과 생활개선을 위해 활동해왔다.

1996년부터 사회복지선교회로 이름과 활동방향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도 인천지역 노동자를 대변해오고 헌신한 단체로 66년 3월 화수동본당에서 출발됐다.

당시 본당 신자를 중심으로 동일방직, 이천전기 노동자들이 팀을 이루었고 이어 답동성당에서는 간호사와 은행원 중심으로 조직됐다.

JOC 회원들은 각자의 ‘일상생활 환경 속에서 동료에 봉사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최초의 인천JOC 사건은 1968년 1월 강화 심도직물회사에 발생한 ‘박부양 분회장 해고사건’이다.

강화도 직물노조 분회장으로 선출된 박부양이 해고되자 300여명의 노조원들이 강화성당내 근로자센터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강화도내 21개 직물업자들이 인천JOC 회원은 고용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했다.

이에 천주교 주교단은 비상주교회의를 소집하고 성명을 발표해 사회문제로 비화됐다.

박부양은 68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승소한다. JOC는 6,70년대 산선과 연대해 동일방직 여성노조원을 소그룹으로 조직해 활동했다.

77년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에 선출된 이총각도 67년부터 JOC 활동을 했다.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76년 10월30일 결성됐다.

초대 위원장에 김병상 신부를 선임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힘을 모았다. 78년에는 동일방직 사건과 관련해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이 사건과 관련돼 구속된 노동자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인하대 학생들을 위해 헌금을 모금해 도왔다.

조성교 신부, 호인수 신부가 인천정평위 소속 신부로 활동했다.

엠네스티 인천지부도 78년 12월부터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해산되기까지 도화동성당 황상근 신부를 지부장으로 선임하고, 지역 양심수를 선정해 돕는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79년 2월에는 인천 가톨릭회관에서 당시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했으며 8월에는 송현동성당에서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이우재 석방 환영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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