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그의 외손자가 강화학파의 명맥을 잇고 있다. 강화학파에 대한 연구는 인천 근대지성사의 복원과 그 궤를 같이한다.
강석화(45)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는 지역과 중앙을 넘나들면서 한국사의 영역을 개척하는 연구자다. 한편, 교사 양성에 매진하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강 교수로부터 지역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함께, 최근 또 다시 이슈로 떠오른 중국의 ‘동북공정프로젝트’에 대한 복안을 들어봤다.

“계양구에 역사학자가 새로 왔습니다.”
1998년 가을, 30대 중반의 강석화 교수가 경인교대 사회교육과로 발명받자 당시 구청장(민선2대 이익진)은 그를 호출했다.
두툼한 분량의 ‘계양사’를 재편집, 요약·정리판으로 ‘계양의 어제와 오늘’을 내는 일을 맡았다. ‘계양사’는 여러 필자가 작성했던 탓에 중복이 심하고 내용이 번다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쉽게 계양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민선 3대 박희룡 청장은 강 교수에게 ‘황어장터 3·1만세운동 성역화 사업’을 맡겼다.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와 함께 자료를 발굴, 황어장터 기념관의 콘텐츠를 복원해 냈다. 인천 독립운동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강 교수가 지역의 일을 하게 된 이면에는 대학선배 이영호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을 요구했단다.
그는 현재 강화학파에 대한 줄기찬 연구를 펼치고 있다. 동시에 전공분야인 조선후기 북방지역의 군사관계에 매진하고 있다. 이어서 조선후기 북방지역의 사회·경제사를 공부할 계획이다.
강석화 교수는 광역시 ‘인천’의 위상에 걸맞게 연구자가 대우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을 제외하면 연구자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광역시 또는 4대 도시라는 인천의 위상에 맞게 연구자들이 인천으로 모여들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등을 아껴선 안 될 것입니다.”
강 교수는 인천시가 추진하는 동북아경제 전략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다. 송도에 우수한 대학이 들어오겠다고 한 점을 가볍게 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공부를 하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야말로 도약의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인천이 잘나갈 때는 충남과 황해도까지 포괄했습니다. 해방이전에는 서산, 아산뿐만 아니라 황해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찾았습니다.”
한편, 강 교수는 행정당국의 문화마인드를 꼬집기도 한다. 자치단체 등에서 일과성 행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물관같은 하드웨어를 만들 때 20억∼30억원 상당의 건립비는 쉽게 내줘도, 완공 후에 소요되는 관리비 1천만원은 아까워하는 실정이다. 20억원을 들여서 지을 것을 15억원선으로 맞추고, 나머지 5억원은 기금으로 적립해 사후 관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동북공정 문제로 시선을 옮겨갔다. 강 교수는 거침없이 동북공정의 허약한 논리를 짚어냈다. 가장 쟁점이 되는 조공문제. 중국은 고구려를 일컬어 ‘조공을 바치는 지방정권’이라 했다.
강 교수는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이미 별개의 나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공은 국가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외교형식이기 때문에, 제대로(?) 왜곡하려면 ‘세금을 내는 지방정권’이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현실적 토대가 부족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우리가 옛날에는 대단했지’라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거나, ‘원조’를 내세운다. 중국이 딱 그 꼴이라는 것이다. 당, 명, 청 같은 제국의 시절에는 결코 화려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강 교수는 오히려 과도하게 대응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이슈가 될 때는 그 이슈를 띄우는 사람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이다. 최근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을 예로 든다.
재단은 고대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문제를 중심과제로 현안이 있을 때마다 대응논리와 연구 성과를 정기적으로 내야하는 시스템이다.
이 점이 한계라는 것이다. 이러다보면 볼륨만 강조하게 되고 기존 자료만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축적’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철저하게 연구자 중심으로 재단이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연구자 중심으로 집중, 고대사만 띄우는 것이 아니라 원, 명, 청 때의 동북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강 교수는 우리에게 ‘분단’이 매우 독특한 과제를 줬다고 한다. 대륙과 접촉에 실패한 채 ‘우물안의 개구리 상태’에서 성장하다 맞게 된 시련이 IMF라는 것이다. 국제적 마인드와 기준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
“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위당이 어느 비오는 날 남대문역 앞에서 남루한 노인(스승 이건방)을 만나자 진흙탕 속에서 무릎을 꿇고 절했다는 일화를 수업시간에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그의 손자라고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에서 27등 하고 있었거든요.”
강석화 교수의 외할아버지는 식민지시대 대표적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1892∼1950) 선생이다.
1968년 영인본으로 나왔던 위당의 문집 ‘담원문록’이 최근 번역·출간됐다. ‘담원문록’은 위당이 남긴 행장·전(傳)·제문·만사·묘비문·서(書)·서(序)·시(詩)·화제(畵題)·편지에서 훈민정음 창제 및 보급과정, 고대사에 대한 위당의 식견을 엿볼 수 있는 논문 등을 수록한 문집이다.
번역을 맡은 이는 위당의 셋째 딸이면서 강석화 교수의 모친인 정양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이다. 1982년부터 번역을 시작, 24년 만에 마쳤다.
정 전 교수의 남편은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49학번 캠퍼스 커플이다.
위당 선생은 한국전쟁 때 납북,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외손자 강석화 교수는 외할아버지의 저술을 읽으면서 역사학자로 성장했다.
강 교수는 외조부의 ‘얼’ 사상을 통해 주인의식을 배웠고,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을 읽으면서 실학의 개념을 터득했단다. 기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 밀고나가는 능력이야말로 실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학은 중국 명나라 때 유행했던 양명학과 연관을 맺으면서 ‘강화학파’를 꽃피웠다. 하곡 정제두(1649∼1736)가 강화도에 한국 양명학의 뿌리를 내린 이래, 학산 정인표, 경재 이건승, 난곡 이건방 등이 양명학을 위당 정인보에게 전수했다.
강석화 교수가 ‘강화양명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도 있을게다.
-----------------------------------
<학력>
▲80년 서울 대일고등학교 졸업 ▲85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졸업(문학사) ▲8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석사) ▲96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경력>
▲87 ∼ 90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학과 전임강사 ▲90 ∼ 92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강사 ▲92 ∼ 9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93 ∼ 98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98 ∼ 2000년 인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전임강사 ▲2000 ∼ 2004년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조교수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부교수

<저서>
‘한민족전쟁사총론’(1989)
‘홍경모·이원익’(1994)
‘강화지역 실학자’(2000)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2000)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