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이귀복 도선사

인천항도선사회를 이끌고 있는 이귀복(63) 도선사는 올해로 도선사에 몸담은지 16년 째다.

그 동안 인천항도선사회장, 국제도선사협회 부회장,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 한국도선사협회 회장, 한국해양소년단 부총재,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장 등의 굵직한 직함을 거치면서 어느덧 인천항의 ‘중요 인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도선업뿐 아니라 인천항과 관련된 제반 분야에서도 풍부한 경륜을 갖춘 그의 역할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천항발전협의회 차기 회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점도 그의 관록이 만만치 않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구 항동 정석빌딩 8층에 있는 인천항도선사회 사무실에서 이 도선사를 만났다.


 

 40년 가까이 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해양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 동기가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한 적은 없었나.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학교 바로 위에 있는 자유공원에 자주 올라갔었다. 눈 아래 펼쳐진, 죽 늘어선 외항선들을 보며 흔한 말로 ‘뱃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다양한 외국생활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시 한 스승님의 말씀도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또 당시 급격히 기운 가세는 학비를 전액 국비로 지원해주는 한국해양대학교 진학을 결심하는데 촉매제역할을 했다.(이 도선사의 부친은 해상운송업을 했으나 쌀을 잔뜩 싣고 가던 선박이 인천앞바다에서 좌초하는 바람에 집안형편이 매우 나빠진 상태였다) 배를 타며 보내온 시간이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동안 후회해본 적은 없다.

오랫 동안 배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생활에 어려움도 적지 않았을텐데.

장기승선은 정신력과 신체적 조건, 가정의 화목 이 세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가능하다. 다행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 정신적·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도선사들에게 인천항은 기피의 대상으로 알고 있다. 첫 발을 인천항에서 내디디게 된데 고향이라는 점이 작용을 했나.

도선사들은 대부분 기후가 따뜻한 남쪽 항만을 선호한다. 겨울에 일을 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천항은 의무도선구간이 긴데다 항로가 까다롭고 갑문이라는 난관이 있어 솔직히 도선사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는 곳이다. 임지선택을 할 때 사실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와 20여년 동안 떠났던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인천으로 왔다.

도선사라고 하면 일반 사람들은 고소득이 보장되는 화려한 직업으로만 알고 있다.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이 있을텐데.

좋은 시절을 바다에서 다 보내고 나이 50을 전후해서야 할 수 있는 것이 도선사다. 그리고 도선사는 반드시 정년 때까지 100% 현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새벽이든 한겨울이든 계절과 밤낮의 구분이 없는 고된 일이다.(이 도선사는 인터뷰를 한 당일에도 밤 10시에 도선업무에 들어갔다) 옛날에는 수입이 좋은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도 적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 10년 간 도선료 인상률이 26%에 불과,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낮았다.

인천항도선사회장 출신으로 유일하게 한국도선사협회장을 지냈다. 3년 동안의 협회장 재직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수역이용료 폐지를 꼽을 수 있다. 연간 5억~6억원에 달하는 수역이용료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조건으로 폐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 재원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해 해양대 후배들의 외국유학을 지원하고 있으며 심장병어린이들을 돕는데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해보면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 대표들은 언어장벽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장학재단을 통해 외국유학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2015년 IMPA(국제도선사협회) 회의를 한국에 유치한 것도 협회장 재직시 이뤄놓은 일이다.

한국도선사협회장 재직 때 인천회장 시절의 공금횡령시비에 휘말려 큰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고 있다. 마무리는 됐나.

협회장 선거 과정에서 상대 측으로부터 난데없는 공금횡령의혹이 불거져나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저와 관련된 일로 3년여에 걸쳐 진행된 조사 때문에 많은 직원들이 괜스런 고생을 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올 1월 모든 사항이 무혐의로 마무리됐다.

인천항발전협의회 후임 회장 후보로 강력히 거론되고 있다.

인천항은 현재 신항 및 국제여객터미널 건설, 내항재개발 등 인천항의 미래를 좌우할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 만큼 발전협의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의미다. 인천항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발전을 바라는 분들이 많이 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인천항의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단 저에게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도선사란 직업의 특성상 낮밤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 나가야 하는 문제에 대한 내부조율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박상은 국회의원 주도로 인천항경쟁력강화위원회 신설문제가 대두되면서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신설에 긍정적인 사람이든 부정적인 사람이든 (박 의원이) 정치인이라는 점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저는 문제를 보다 크고 넓게 보고, 현재 인천항을 위해 성심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힘을 보태주자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인천항발전협의회 후임 회장단에 일임하는 쪽으로 결정이 된 상태다.

인천항이 일류항만으로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또 본인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

크기나 종류에 관계없이 어느 배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며 배들이 싣고 온 화물의 유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육상물류체계구축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인천항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바다나 배에 대해 도선사 만큼 세밀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힘이 닿는데까지 도선사로서 쌓은 소중한 경험을 토대로 인천항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 글 = 이인수기자 yis@i-today.co.kr 사진 = 안영우기자 dhsibo@i-today.co.kr

 

 

도선사(導船士, pilot)는 항만이나 운하 등 특정 구간에 걸쳐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다.

도선사는 해당 항만의 물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에 500t 이상 외항선박이 항만을 입출항 때는 반드시 도선사들의 도움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칫 잘못 돼 사고라도 나면 일반 도로와 달리 부두 전체가 마비돼 돌이킬 수 없는 국가 물류대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도선사들의 역할은 항만에서 누구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도선 대상 선박이 외항에 도착하면 도선사는 소형 파일럿보트를 타고 2~3마일 밖 외항으로 나가 10~20노트로 운항 중인 대형 선박에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워낙 위험한 작업이다 보니 9m 이상 올라가야 할 경우 줄 사다리 대신 조금 안전한 철제사다리를 사용하도록 국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6천t 이상 선박의 선장으로 5년 이상 근무해야 도선사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매년 실시되는 시험의 경쟁률이 평균 10대 1을 기록할 정도로 높다.

 

이귀복  도선사 약력

1966년 2월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1972년 2월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 졸업

1972년 2월~1994년 7월 범양상선(주) 항해사 및 선장

1995년 2월~현재 인천항도선사회 도선사

1997년 3월~1999년 3월 인천항도선사회 업무이사

2003년 3월~2005년 3월 인천항도선사회 회장

2003년 5월~2009년 2월 재인 한국해양대학교 동창회장

2006년 2월~2009년 2월 한국도선사협회 제14회 협회장

2006년 2월~2009년 2월 한국해양소년단 부총재

2006년 4월~2008년 8월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

2006년 11월~2008년 8월 국제도선사협회(IMPA) 부회장

2008년 8월~2009년 7월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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