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김도현 시유도회 수석부회장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1900년대부터 인천과 하와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어졌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이민을 갔던 동포들 중 86%가 인천 사람이었고, 대한민국 독립자금 중 78%가 이들이 힘든 노동을 하며 번 돈이었다.

이주 50년을 맞은 1954년,이들의 희생으로 만든 기금으로 인천 인하공업대학이 세워졌다. 이 것이 그동안 인천(仁川)과 하와이(荷?伊),

앞 글자를 딴 '인하(仁荷)'라는 단어가 인천의 한 줄기 뿌리 역할을 해온 이유다. 때문에 인하대학교를 빼놓고 인천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인하대 운동부를 만들고 키우는 산파 역할을 해 온 김도현(63)씨는 요즘 인하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자격으로 하와이를 오가며 인천의 역사를 재발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인천시유도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의 체육인이자 '영원한 인하(仁荷)지기'로 통하는 김도현 부회장을 만나봤다.

인하대 창학 배경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1902년 제물포항에서 102명의 한인들이 첫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이 중 86%가 인천사람이었다. 이들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1918년 한인기독학원을 개교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점점 하와이 본토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1947년 한인기독학원 문을 닫고 15만 달러에 매각됐다. 하와이 동포사회에서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업을 알아보고 있던 1950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인천에 대학을 짓기 위해 매각대금 15만 달러를 쾌척했다. 국고보조금은 물론 지역 기업인들의 기부금, 전국 공무원들의 봉급에서 5%씩을 떼어 기금을 마련했다.

1954년 당시 표양문 인천시장에게 땅을 기부 받아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됐다. 결국 인하대 설립은 이승만 정부와 하와이 이주민들의 희생, 인천시, 국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하대를 민족사학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이유다.

오는 30일 월미도와 팔미섬에서 하와이 이민선 첫 출항을 재현한다고 들었는데.

하와이 이민 선조의 정성과 민족의 성원으로 창학한 인하대가 총동창회 창립 50주년 마지막 행사로 마련했다. 인천 제물포항은 우리나라 첫 하와이 이민선 출항지다. 제물포항 대신 월미도와 팔미도에서 행사를 갖고 인천-인하-하와이의 숙명적인 인연을 기념할 계획이다. 이날 하와이 동포와 지역 인사, 동문, 교직원 등과 해군 함선에서 행사를 연다.

지난해 총동창회 50주년을 맞아 하와이를 방문했는데 성과는.

하와이에 가면 인천과 인하대, 이승만 박사의 인기가 대단하다. 오죽하면 8월15일이 이승만 대통령 날이겠는가. 또 ‘파와아 네이버후드 공원’을 ‘인하공원’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가 독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숯가마터를 운영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이드에게 찾아달라고 했다. 거기서 나온 몇가지 유물을 인천에 갖고 왔다. 새로운 역사를 발굴한 것이다.

인천시는 지난 2004년 하와이와 자매결연을 맺고 하와이 동포들의 의견을 수렴해 월미도에 이민사박물관을 건립했다. 현재 하와이는 하와이 이주민 문화회관을 짓는데 분주하다. 인하공업대학 설립을 위해 15만 달러를 내놨던 것 처럼 우리도 하와이 문화회관을 짓는데 일조하고 있다.

인하대 총동창회 창립 반세기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난해 말 총동창회 50년사 책을 만들어 시와 군·구, 학교에 모두 전달했다.

이 50년사를 통해 인하대를 자세히 알게 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뿌듯하다. 인천 시민들의 자부심도 더 높아지길 바란다. 신입생들에게도 인하대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총동창회에서 홍보 CD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우린 ‘인하’라는 이름 때문에 인천을 떠날 수 없다. 앞으로 인하대도 송도시대가 펼쳐진다.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대학이 되기 위한 발돋움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한 지역대학으로서 남기 위해 동문들과 힘을 모아 인하대를 이끌어가겠다.

이미 끝난 얘기지만 인하대가 지역약학대로 선정 못됐을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너무 화가 난다. 인천의 뿌리이고 인하대학교 병원까지 갖춘 인하대를 탈락시키고 개교 조차 않은 연세대를 선정했다. 이해를 할 수 있겠나. 연세대가 인천지역 대표 대학인가. 지역 연고성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심사의 공정성에 의문이 든다.

인하대 12개 운동부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대학운동부의 역할에 대한 생각은.

대학교 중 구조조정이 가장 쉬운 곳이 운동부다. 더욱이 대학 스포츠가 점점 인기가 없어지고 있다. 학교도 많은 육성비를 지원하는 반면 얻는 것이 희박하다. 더욱이 등록금도 동결됐고, 학교 재정 갖고는 어렵다. 동창회 차원에서 활성화 시키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경기도 주말리그 위주로 치러져야 한다. 학생들도 공부를 하면서 앞으로의 진로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육인으로서 성공적인 인천아시안게임을 치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시체육회에서 2014우수선수 명단을 발표하거나 추진하는 방향을 보면 답답한 게 많다. 물론 각 연맹에서 추천을 받아 우수선수를 선정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선수를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하다. 선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전문가나 심의위원 등 명확한 선발 기준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국체전이 전부는 아니다. 결국 스포츠과학화 등 시스템 연계가 늦은 것이다.

또 아시안게임의 주인공인 체육인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뿌리를 모르는 조직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 체육인들로 기반을 다지고 함께 진행해야 원할한 운영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인하대의 창학배경을 이해하면 인하대를 민족사학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인하대는 인천과 하와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인하대 동문과 시민들은 인천의 자부심을 갖고 인하대를 바라보길 바란다. 나도 영원한 ‘인하지기’로서 대학을 위해 헌신할 것이다. 정리=조자영기자 idjycho@i-today.co.kr 사진=안영우기자 dhsibo@i-today.co.kr

김도현 수석부회장은

1948년 4월 평택 출생·평택고 졸업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 졸업(공학사)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체육전공) 졸업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사회 고위지도자 과정 수료
인하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 수료

경력

1975년 3월~2008년 8월 인하대학교 체육진흥과장, 재무부처장, 총무부처장, 취업지원센터소장, 대외협력부처장 등 역임2009년 5월 유도공인 8단(제10349호)
2001년 1월~2008년 12월 인천시 제7·8대 체육회 이사
1975년 1월~1981년 6월 경기도유도회 전무이사
1981년 7월~1996년 12월 인천시유도회 전무이사
1997년 1월~현재 인천시유도회 수석부회장
2009년 8월~현재 인천시유도 고단자회 부회장

수상경력

1978년 11월 대한체육회 표창
1985년 2월 대한유도회 공로상·1985년 4월 인하학원 이사장 표창
1988년 12월 문교부장관 표창
1996년 12월 인하대학교 비룡대상(체육부문)
1997년 2월 인천체육회장 특별 공로상
2005년 5월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2008년 8월 인하대학교총장 공로패
2008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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