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서울의 (주)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와 공동으로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동(농구와 럭비전용)경기장과 계양(양궁과 배드민턴 전용)경기장 설계공모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면서 사무소의 위상이 급부상하였다.

인천기계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하게 된 조 대표는 스스로가 ‘은둔형 건축사’라고 자임할 만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에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중요한 프로젝트에 당선하였지만 내세우기보다는 은인자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듯했다.

“처음 당선 소식을 접하고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지역 안에 공교롭게도 ‘포럼건축’이라는 동명의 건축사사무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곳은 한글로 사업장명칭이 등록되어 있고, 저희는 영문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설마 조항진이’ 했던가 봐요. 그래서 그쪽 사무실로 축하인사가 쇄도했다고 했는데 막상 그 사무소에선 금시초문의 일이었던 거고. 결국 제가 당선한 것을 알게 되었던 거죠. 지금도 당선 사실을 자랑하고 다니진 않아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사 선후배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한주건축과 금호건설 설계실에서 실무를 익혔으며, 특히 금호건설 재직시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 등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BTL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설계와 시공의 관리시스템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후 동일방식의 설계수주 시스템에 남보다 발 빠르게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조 대표의 독립적인 건축행보는 인천을 벗어난 충남 서산에서 시작하였다.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한 서산으로 귀향을 결심하게 되는 시점은 1996년. IMF 직전 서산의 발전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3년 가까이 서산을 드나들며 적응기를 가졌던 그는 1998년 예일건축을 거쳐 1999년 도림건축으로 개업했던 것.

“어머니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셨지요. 그 때에 생각했던 것이 공기 맑은 곳에서 지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처음엔 지역의 상황도 판단할 겸 저 홀로 내려갔습니다. 애들에게도 자유로운 전원생활이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모두가 짐을 싸들고 내려갔지요. 그렇게 지낸 몇 년 사이에 어머니의 몸 상태도 좋아지셨고, 서산에서의 일도 곧잘 추진되었습니다.”

조 대표는 서산에서 설계사무소 등록할 때에 충남건축사회가 보여준 사무국의 업무태도에 대하여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타지에서 온 건축사를 회원으로 가입하는 과정에서 사무국 책임자가 나서서 지역 건축사회의 현황정보와 행정사무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해주며 ‘뜨겁게’ 맞이해주었던 그 때의 기억이 무척 생경스러웠다는 것이다.

“2001년 인천으로 전입해오면서 사무소명칭도 Forum건축으로 개명했습니다. 지금의 인천건축사회에 회원 신고를 위해 찾아갔는데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어요. 그때 비로소 충남건축사회가 보여준 환대가 무척 소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무국의 책임자는 멀찌감치 앉아 있고, 직원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해줄 뿐 건축사회의 회원 자격으로 찾아간 사무국에서 홀대를 받았다는 느낌이 컸어요. 인천건축사회 건물을 나섰을 때의 기분은 참 머쓱했습니다.”

“서산의 지역 건축사들은 중앙에서 활동하는 건축사들과 달리 필요 이상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동시에 서산의 개발 무드를 타볼 요량으로 서산행을 결심한 저였지만 IMF 이후 서산지역의 개발호재 또한 식어버렸어요. 그런저런 이유로 인해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겁니다. 결심이 섬과 동시에 나고 자란 인천으로 되돌아오기로 했던 것이지요.”

막상 인천으로 돌아온 그였지만 특별한 연고가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꺼려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있던 터라 초기에 자리를 잡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다행히 조 대표에게는 세상의 동향을 읽는 남다른 버릇이 있었다. 서산을 택하여 귀향했던 것도 그랬지만 인천에서 첫 일을 시작하면서도 그랬다. 2002년 명지대 대학원 문화재학과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기로 한 것이다. 항차 한옥의 보수 등과 관련된 직무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3년간에 걸친 일과 공부와 강의(당시 신성대학에 출강)를 병행하는 강행군을 했던 것.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새벽 1시였어요. 3년을 그렇게 생고생을 했지요.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의지를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할만한 것이었어요. 건축이란 직업이 항상 새로운 일을 하는 특별함이 있잖아요. 생각여하에 따라서는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넓은 세상과 만나는 일이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직종이지요. 그 같은 활력을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집도 귀하게 지을 때에 소중한 줄 알고, 내일의 문화재라는 생각으로 지을 때에 건축의 생명력도 길어진다고 말하는 조 대표는 작금의 재개발 재건축의 폐해에 대하여 건축사의 고뇌를 드러낸다. 지난 세월, 우리 주변의 수많은 건물들이 건축의 가치를 제고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지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이 오늘에 와서 원주민을 몰아내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4시간 여, 계양구와 강화군 및 송도국제도시로 이어지는 조 대표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한 건축투어 내내 그와의 대화는 끊어짐이 없었다. 인천에서의 사무소 개업 10년을 바라보는 그 또한 설계한 다수의 건물이 설계입찰방식으로 수주되고 있었고, 현장은 설계자의 손을 떠난 채 공사와 감리가 이루어져 건축가의 온전한 건축의지를 확인하는 것은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건축공간과 외부 형태에 심은 반짝이는 작은 아이디어 하나하나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오늘보다는 내일의 건축이 훨씬 나은 성취를 일궈내리란 가능성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글: 전진삼(건축비평가,<와이드>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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