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좋은 점은 많아요, 그리고 나쁜 일 또한 많아요. 한국의 나쁜 점은 한국사람 대부분이 구두쇠이고, 남의 흉도 보고해요, 한국에 처음 와서 좀 답답했어요.’ 태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지 7년 차인 와랑카나(30)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방인’의 고독을 혼자서 삭혀야만 했다. 피부색이 좀 다르다고 힐끔거리는 한국인의 시선이 싫었고, 어눌한 말씨 탓에 선듯 한국 사람에게 다가가기도 겁이 났다. 방안에 갇혀있다시피 하면서 냉가슴만 앓았다.

용기를 내 결혼이주여성 한국어 교실을 찾았다. 비슷한 처지의 결혼이주 여성들이라 통할 것 같았다. 한국어를 알면서 서먹한 분위기는 그녀들의 수다로 금세 금이 갔다. 태국·베트남·중국·몽골… 각자 나라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콩 한쪽에서 움트는 정도 맛봤다. 한국어도 웬만큼 늘어 취직도 했다. 태국에 있는 부모에게 용돈도 보내주고, 태국 친정에 갈 때 선물 보따리를 장만할 요량이었다. 지금 와랑카나는 행복하다. 할 일도 있고, 해내고 싶은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천시 부평구 원적산 밑 가난한 ‘뫼골(山谷)’사람들의 희망 세상 만들기는 2000년에 싹 텄다. 산곡·청천동 뫼골은 예나 지금이나 부평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다. 그만큼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가난한 동네다. 오죽했으면 뫼골을 ‘마장(馬場)’이라고 불렀을까? 논밭에 댈 물이 없던 탓에 뜰은 말미 좋아하는 억새풀과 초지가 무성한 허허벌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물자 생산기지인 조병창이 들어섰다. ‘관동주’로 불렸던 백마장 입구 산곡동에는 지금도 일본인 토건업자 이름을 따서 지은 일본식 벌집 ‘다다쿠미(多田組)’를 흔치않게 볼 수 있다. 1960년대 청천동에는 음성 나환자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닭은 키우는 양계 마을이 있었다.

1970~80년대 부평4산단을 끼고 있던 뫼골의 아침 골목길은 부시시 졸음이 붙은 눈을 한 채 공장으로 줄달음치는 젊은 일꾼들이 메웠고, 저녁에는 ‘달그락, 달그락’ 양은 밥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백열전등 빛이 어스름한 월세방 창틈에서 새어나왔다.

없는 자의 아픔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만이 보듬을 수 있다고 했던가? IMF관리체제 직후이었다. 동네는 점점 흥이 잃어가고 있었다. 공장 가동 시간은 줄고, 노동자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1980년대부터 탁아소를 운영하던 한 지역단체의 회원이 꾀를 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판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경로잔치 말고 동네축제로 키워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청천, 산곡동에는 예전부터 활동해오던 청년회와 공부방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이들이 참여해 동네축제를 의논하다보니 수월했죠” 동네야 놀자 이충현(43)집행위원장도 당시 공부방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동네축제는 활동가 중심으로 그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 그대로 동네 사람의 참여가 없으면 동네축제가 아니라 동아리 축제, 그 모양새일 뿐이었다.

축제위원회를 새롭게 짰다. 축제 준비와 행사, 평가까지 동네주민들이 맡기로 했다.

단 동네 일에 참여하지 않는 외부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했다. 공연도 초청공연이 아니라 동네 공부방과 학교의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장년과 어르신이 진행하기로 했다.

축제에 드는 돈은 회비나 동네슈퍼와 생선가게, 학원 등에서 1만~2만원씩 보낸 협찬금이 다였다. “동네야 놀자 축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겁니다. 동네 일 갖고 다른 사람들한테 손을 벌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동네 사람들은 주인이 아니라 그냥 구경꾼일 뿐입니다.”

동네야 놀자 축제가 네 번 째 되던 해였다. 음력 5월5일 단오에 축제를 하다 보니 늘 장마철과 겹쳤다. 그해 축제 역시 장대비 속에서 치러야 했다.

“준비위원 중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큰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한 위원이 대수롭지 않게 ‘하늘을 막으면 되잖아, 그게 무슨 걱정거리야!’라며 너스레를 떨었죠.” 준비위원 회의 결과 공원전체에 비닐 천막을 씌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 날 아침, 영락없이 날은 비를 쏟아낼 기세로 꾸물거렸다. 길이와 폭 18m 짜리 하우스용 비닐이 뫼골 공원에 나타났다. 비를 피해 추녀 밑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주민들이 ‘하늘공사’를 보고는 너도나도 품을 보탰다. 두개의 기둥에 길이 12m의 철봉이 얹혀졌다. 철봉에 걸쳐 비닐을 당기고 묶었다. 공사 3시간 만에 뫼골공원 반쪽 하늘이 비닐로 쳐졌다.

주민들 사이에는 전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동네야 놀자는 하늘도 막아!’ 그것이었다.

해를 거듭 할수록 동네야 놀자 축제에는 전설에 전설이 얹혀지고 있다. 첫 해 200명이 참가 주민들은 1천 명에 달하고 있다. 참여 주민 수만큼이나 열기도 한층 가열됐다.

동네야 놀자 축제는 공원 노숙자들에게도 잔칫날이다. 축제 일정과 시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면 시키지도 않은 명예 축제위원이 나타난다. 공원서 늘 술에 취해 벤치의 주인노릇을 하던 노숙자들은 술병 대신 빗자루를 든다.

“처음 축제 때에는 ‘술 달라’고 억지를 부리던 노숙자들이 ‘동네야 놀자 축제 때까지 매일 청소를 한다’며 어깨를 으쓱거린다”고 이 집행위원장은 전했다. 소외와 차별이 없는 잔치, 동네사람 모두가 주인공인 축제, 동네야 놀자 축제가 10년 째 이어지고 있는 비결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해마다 넉넉한 재정? 소박한 마음이 기적을 만드네요”

이충현 집행위원장

‘동네야 놀자에는 마법이 있습니다. 늘 모자라지 않는 재정입니다.” 동네야 놀자 이충현(43)집행위원장은 믿는 구석이 있다. ‘사람 냄새가 나는 동네 돈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경기가 안 좋다 싶으면 당장 표 나는 것이 청천·산곡동이다. 비정규직이나 일용직 근로자가 많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초청공연과 값나가는 경품도 없지만 그래도 매년 800만~900만원씩 들어가는 축제경비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경로잔치를 제안했던 회원이 주변인들에게 후원을 받아 잔치비용을 대고, 공부방 자모회와 교사회에서 성금을 내기 때문이다. 경비가 모자란다 싶으면 슈퍼와 방앗간, 미용실 등 동네가게에서 돈을 내 희한하게도 성금은 줄지 않고 매년 조금씩 늘어난다.

“욕심을 버리는 겁니다. 주민들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동네야 놀자 경로잔치에 동네 어르신 1천 명 정도가 온다. 자원봉사자 150여명이 3일 전부터 부침개 등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손질한다. 공연도 어린이집과 공부방 꼬마에서부터 청소년, 아줌마까지 하나같이 동네 사람 몫이다. 머리감기 체험의 창포물도 회원이 직접 키워서 댄 것이다.

경품은 소박하다. 씨름판에서 하루 종일 젖 먹던 힘까지 써가며 장원을 해도 경품은 20㎏짜리 쌀 두 포대다. 다른 경기에서 1등을 해봤자 달걀 1판이 최우수 경품이다. 청천·산곡 사람들은 ‘나눔의 기적’을 알고 있다. 부평구 산곡1동 여럿이함께하는 동네야 놀자 사무실 안 ‘착한가게’에는 얼핏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낡은 기타, 헤진 농구공, 버려도 아무도 거들떠 안 볼 것 같은 머리띠…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1천~2천원 씩 주고 가져다 쓴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아름’이라는 지역화폐도 만들었다. 돈으로 매긴 품으로 물건을 살 수 있거나 품을 준 사람에게 품을 요구할 수도 있다.

착한가게의 수익금은 홀몸노인들의 밑반찬과 난방비로 사용한다. 남는 회비와 후원금은 한 달에 5만원씩 학생 10명의 용돈으로 내놓는다. 더 많은 나눔을 퍼트리기 위해 올해 리폼교실을 열었다. 버려지는 의류와 전자제품, 생활용품을 수리해 다시 쓰는 기술을 알리는 프로그램이다.

“올해 정말 걱정입니다. 동네야 놀자 축제가 월드컵 개최 다음 날 열립니다. 후원금도 안 걷히고, 주민들도 안 나오면 어떡하죠?” 이 위원장은 엄살을 피우며 껄껄 웃었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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