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욱(46·하이저니건축 대표). 울산에서 태어났다. 박통시절, 전폭적인 정부지원 하에 개교하여, 일찌감치 엔지니어의 꿈을 가진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었다는 국립부산기계공고(구 한독기계공고)에 유학을 하면서부터 몸에 밴 유목민적 기질이 오늘도 여전히 그의 존재감을 확인케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2년 전, 인천에 둥지를 튼 그에게 이곳은 무연고의 활동무대이며, 아직은 몇 개 안 되는 프로젝트만 성사시킨 까닭에 모든 게 낯설어 보였다. 경상도 사내의 고유한 말투와 억양이 그의 강인해 보이는 얼굴과 풍모와 겹치며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사실 박 대표가 인천과의 연을 맺은 것은 2001년 팔미도등대 신축 디자인이 계기가 되었다. 공간건축 재직 시 알게 되었던 선임자 김명규(KES 건축 대표)를 도와 현상설계공모에 참여하여, 당선을 시킨 것. 그의 이력에는 당시의 기록을 디자인 코디네이터로 명기해 놓고 있다. 공간건축은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김수근 선생이 1960년에 김수근건축연구소로 창립한, 국내를 대표하는 건축사사무소로서 박 대표는 1992년 공간의 2대 수장인 장세양의 문하에서 이 그룹의 전통적인 아뜰리에 방식의 건축수업을 받게 된다.

1995년 맏이로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돌아봐야 하는 시점에 봉착한 그는 기업형 대형설계조직인 삼우설계에 경력직으로 이직하게 되면서 일생일대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공간에서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던 그였지만 삼우설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속칭 그레이트 홀(Great Hall)이라 명명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 교통센터 지상부의 실시설계 수행과정에서 그는 건축사사무소 경력의 연차를 무색케 하는 종횡무진 활동을 벌인다.

당시 그레이트 홀은 국제현상설계를 공모하여 당선작을 뽑은 상태였다. 국내의 건축설계협력사들은 영국의 테리파렐건축이 보내온 계획안을 토대로 국내 건축법과 행정의 지원, 실시설계의 보조인원투입만 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문제는 당선안을 보내온 테리파렐건축이 원화를 기준으로 설계계약에 임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 돈의 가치가 끝없이 하락하는 과정에서 급기야 그들이 손을 떼었던 것. 이에 그들과 컨소시엄으로 참여했던 삼우설계는 단지 당선안의 형태와 개념 위주의 기본 도면에 의존하여 실시설계를 추진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작금에서는 비정형의 건축설계와 공사조차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지만 자유 곡선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조형을 감당하기엔 그 시절의 국내 건축설계의 수준은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내로라하는 건축인재들이 모여 있다던 삼우설계 내부에서조차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의 저돌적인 근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그가 졸업한 부산기계공고는 정부의 두둑한 후원으로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명문교로 정평이 나있었으며, 그 바람에 국제기능올림픽도 수차례 개최되었던 학교였다. 그는 재학 중 일반판금기능사, 전기용접기능사, 공업배관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바 있다. 특히 판금기능사를 준비하면서 그가 특히 잘해냈던 분야는 전개도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후 인천국제공항 교통센터의 자유곡선을 CAD도면화하여 납품하게 되는 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의 설계자로 유명한 프랭크 게리가 처음 사용하면서 전 세계의 건축가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접근하여 비정형 건축의 조형을 푸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는 카티아의 존재를 귀동냥으로 듣고, 그것을 국내의 모 자동차 디자인 회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그였다.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몰랐던 그는 입으로 설계를 하고, 자동차 디자인 회사 담당자가 3차원으로 도면작업을 도와 지금의 교통센터 지상부의 그레이트 홀의 설계 도면을 완성했던 것이다. 실시설계도면의 작성부터 현장에서의 설계지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낸 열정의 수년은 그에게 ‘그레이트 박(Great Pak)’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된다.

삼우설계에서 큰 경험을 쌓은 반면 피로도가 누적된 그는 2000년 초이건축의 파트너로 독립한다. 사회에 발을 내딛었지만 울산대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중앙무대는 쉽게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후 프리랜서로, 독립건축사사무소의 대표로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면서 그는 점차 건축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건축인생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새건축사협의회(이하 새건협)와의 인연은 그렇게 출발했다. 건축사들의 존재감을 이전까지의 건축사회가 외면해온 공공성의 덕목과 가치 확장의 기여에서 찾아야한다는 이 단체의 창립기치가 외곬수의 자기세계에 빠져 있던 그를 건져 올린 것이다. 그는 현재 새건협의 실행위원 및 공공디자인위원회 간사로 활약하고 있다.

좋은 선배들의 건강한 건축담론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엿보게 된 그는 공공영역의 디자인에서 건축사사무소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문화역사마을가꾸기 프로젝트, 디자인서울거리 조성사업 등의 연구용역 및 실시설계에 꾸준히 참여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환경디자인사업으로의 확장을 위해 사무소 내에 전담부서를 전진 배치시켰다.

중구 차이나타운 근대건축물의 외관 리모델링 설계를 맡았던 것도 프로젝트가 지닌 공공적인 가치가 그의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설계와 현장의 감리가 구분된 현행 제도 하에서 그가 연구하고 구체화시킨 도면이 100% 반영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쇠락해가는, 그래서 누군가는 부숴버리고 새로 짓기를 조장했을 수도 있는 그 현장을 보존하자는 민관의 공동의지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박 대표는 외지사람으로 서서히 인천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2006년 새건협 선정 ‘신인건축가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글: 전진삼(건축비평가, 격월간 건축리포트<와이드>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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