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결코 허황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현실속에서 그림이 가진 힘이 아주 미미할지라도 나는 그림을 통해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억압하는 시대의 폭력에 대항하고 싶다. 나는 민족적 현실과 민중적 삶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데 온힘을 쏟아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나를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것도 이 때문일 것으로 믿는다.”
이종구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05 올해의 작가’ 초대전을 열면서 밝힌 소감이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내면의 목소리를 현실 공간에 옮겨놓는 도구인 셈이다. 따라서 그림안에는 고스란히 추구하는 삶이 녹아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농민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연원은 20여년을 훌쩍 거슬러올라간다. 20㎏짜리 양곡부대위에 정교한 기법으로 ‘농사를 짓는’ 가족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부와 아버지, 혹은 소, 낫, 호미 등을 등장시키면서 그 세월속에서 농부의 갈등과 절망들을 생생히 그려간다. 민중미술의 영역을 일궈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선 ‘우리미술가’라고 칭한다. 감히 ‘민중미술가’라는 큰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그야말로 이 시대 민중미술의 대부다.

▲국립현대미술관 ‘2005 올해의 작가’
“이름을 걸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80년 초반에는 종로에서 민중미술작품을 전시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국가보안법에 반하는 작품에 대한 안전기획부의 감시의 눈길이 시퍼런 시절이었거든요. 화랑주인들을 닥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도 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야말로 제도권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라는 점에서 국가를 고발하는 그림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이 민중작가 초대전을 연 겁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2005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지식하게 민중미술을 함께 일궈온 동료이자 후배 작가들이다.
“그 시대 상황으론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선택됐다기 보다는 이 시대를 변혁시킨 사람들의 성과지요. 그러기에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올해의 작가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가장 비중을 두고 있는 기획전이다.
미술관측은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 20년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농촌 현실을 주제로 삼아 한국적 원형을 탐구해 왔으며, 그것을 예술적 영역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 왔다.” 그가 작가로서 개척해온 예술 지평이 다시한번 대내외적으로 공표되는 순간이다.

▲고향땅 오지리
1990년 10월 그는 고향마을 충남 서산의 오지리에서 이색 전시회를 연다. 오지초등학교 운동회날에 맞춰 교실을 빌려 하룻동안 작품을 내걸었다.
“개발과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농촌이 해체되는 모습을 이미지로 담아왔습니다. 더이상 희망없는 땅으로 농촌을 해체시킨 우르과이라운드라든가, 소값 파동 등을 비판자적 시각에서 부각시키려 했죠.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농민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오지리에 살고 있는 분들은 내 그림의 모델입니다. 시골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오잖아요. 이날도 나의 모델들이 모두 오셨습니다.”
그곳을 택한 이유는 이렇다. 갤러리가 몰려 있는 서울 인사동은 도시 사람들의 대표적 문화공간으로 교양있는 이들이 찾는다. 역으로 풀자면 농민들은 감히 방문할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림을 그렸던 뿌리를 찾아가 현장에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 것이다. “전시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오지리란 우리나라 농촌 전체의 한 표본이다. 자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농민의 표본인 셈이다.
농촌과 농민을 바라보던 시각은 차츰 국토로 확대된다. 안동의 수몰지역에 댐이 건설되는 현장에서 또 다시 고향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지는 힘없는 이 땅의 농민들을 목격한다.
“국토개발이라는 외형상 발전에 밀려나 희생되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뿌리가 뽑히는 농부의 모습을 르포형식으로 담아냈지요.” 해서 완성된 작품이 폭 200㎝ 부대종이에 그린 ‘국토-수몰지의 마지막 여름’이다.

▲상아탑안 사실주의 거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칭찬이 좋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골학교이다보니 소질을 검증받을 길이 없었지요. 인천으로 중학교 유학을 오자마자 그림이 발탁됐어요. 이때부터 삶의 방향을 미술로 정했습니다.”
1972년 중앙대학교 예술학과 회화과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상아탑에서의 배움은 그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가르침 일색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그리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교수는 위압적이었으며 국전에 입상하는 것만이 최대의 목표였다.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고 뼛속 깊이 강요받았습니다. 우아하고 낭만적이어야 하며 내용을 넣어 그리면 안된다는 논리였죠. 사회는 독재 정권에 눌려 억압받고 있는데 예술은 이와 괴리된 채 유유자적해도 되는가 갈등이 컸습니다. 학교 수업이 아닐 때는 나의 사고를 풍자적으로 그렸지요. 비로소 숨통이 트였습니다.”

▲대학 졸업후 첫 개인전
졸업하자마자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름을 내걸고 습작전을 열었다. 전시 타이틀도 ‘이종구 습작전’으로 붙였다.
“인천시 공보관에 걸었어요. 첫 개인전이죠. 지금보면 철없는 그림이긴 하지만 내안에 꿈틀거리는 이미지를 담아낸 작품들 입니다. 예를 들어 갖고 다니던 가방을 그리되, 뒷 배경은 하늘입니다. 나의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미지를 엉뚱한 장소에서 찾아오는 식이죠. 일종의 초현실주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박한 전시회였는데 뜻밖에 지역 화단이 주목했다. 개인전도 예삿일이 아니었거니와, 대가는 일찌감치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지평을 열다
“민중미술은 개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에 의해 탄생됐습니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대항해 자생적으로 열매를 맺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이 점을 주목했습니다. 제3세계의 독특한 방식으로서 시대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민중 아트’라는 단어를 그대로 씁니다.”
1982년 10월 서울에서는 ‘임술년-구만팔천구백구십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미술동인이 결성, 창립전이 열린다.1982년을 뜻하는 ‘임술년’과 남한의 총면적을 평방킬로미터로 나타낸 ‘구만팔천구백구십이’는 지금(1982년) 이땅(남한)에서 당대적 현실을 표현하겠다는 선언이다. 바야흐로 민중미술운동이 태동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이종구가 있다.
그의 그림을 통한 실천적 삶은 인천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표출된다. 1984년 지역의 젊은 작가들을 모아 미술동인 ‘지평’을 창립,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미술운동의 포문을 연다.
“당시 중앙 일간지가 창립전을 보도하면서 처음으로 ‘민중미술’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민중을 기반으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들이라는 풀이를 달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평’은 인천민족미술인협회(인천민미협)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됐다. 이후 90년대 중반엔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인천지회(인천민예총)로 발전한다. 그는 인천민미협 초대·2대 회장에 이어 인천민예총에선 초대 부회장, 지회장을 맡게 된다. 인천 민중미술이 그의 손에 의해 일구어진 것이다.

▲“다음 대상은 인천시민”
올들어 그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작업을 완성했다. 미군기지가 들어설 대추리에서 농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담은 벽화 ‘내 땅에서 농사 짓고 싶다’를 연작으로 그려냈다. “통일문제와 직접적인 한미관계라는 논리속에서 어쩔수 없이 땅을 빼앗기게 된 농민의 아픔을 목격했습니다.”
이번 가을 그는 평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동기가 있다. 2003년 여름 이라크 바그다드로 날아간다. 섭씨 50도에 이르는 폭염속에서 전쟁의 폐혜를 목격하게 된다. 그해 11월 인천에서 이라크 이슬람 기행전을 열었다.
“농경사회가 희생됐듯이 그들은 미국이라는 패권주의의 희생자들입니다. 대추리와 이라크를 모아서 가칭 ‘평화를 위하여’라는 타이틀로 전시를 열 계획입니다. 마침 인사동에서 평화를 위한 공간이 꾸려진다는 소식입니다. 장소 걱정은 덜었어요.”
이제는 인천시민을 그리고 싶다고 툭 던지는 말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다양한 삶의 주체들을 담고 싶습니다.아픔을 지닌 이들에서부터 지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나아가 외국인노동자까지 40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마주한 사람들입니다.
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크고 작은 지역 문제들이 발전적인 방향성을 갖도록 한편으로는 감시하고 한편으로는 대안을 찾아야지요. 책임감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인천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 @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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