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예정지이었던 경남 통영시 동피랑이 골목벽화 덕에 보전구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학생 등 아마추어부터 기성 작가까지 공모전에 참여한 동피랑 언덕배기 벽화는 공공디지인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참여가 배제된 동피랑의 벽화는 지속가능한발전이라는 과제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동피랑, 그곳에 살고 있는 꿈은 뭘까? 이 꿈은 비단 동피랑의 꿈만은 아닐 게다. 세상에 이리 떠밀리고 저리 치받혀 자신조차 쉬이여기는 가난한 자들, 고비에 찬 숨을 쇳소리로 내뱉으며 조붓한 가풀막을 속절없이 오르내려야만 했던 가엾은 서민들, 아무리 몸부림처도 도리없이 삶의 무게에 눌린 채 하늘을 처마로 삼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 없는 자들 모두의 꿈일 듯하다.

그 꿈은 소박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하다. 왜 부럽지 않았으랴! 번들한 옷과 맛난 음식 그리고 뜨신 집. 살아 숨쉬고 있기에 기름진 물질에 도는 군침은 한가득이었다. 그런들 어찌하랴, 보새기보다 작한 종재기 만한 것이 내 팔자이거늘, 바동댈수록 돌아오는 것은 내 안의 속쓰림뿐이었다. 체념했다. 모진 세상도 더이상 탓하지 않았다.

허나 가냘픈 세상살이에 비록 육신은 초라할지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니 놓칠 수 없는 꿈이 있다. 손바닥만한 툇마루에 야윈 인생을 앉히고 볕든 ‘강구안’을 시린 눈으로 굽어보는 동피랑 노구(老軀)들의 아슬아슬한 바람이다.

2010년 1월29일. 경남 통영시 왁자지껄 중앙시장의 생선 좌판을 두리번거리며 동피랑 어귀에 닿았다. 소라고둥 속을 닮은 비탈길 좁은 골목은 동피랑 사람들의 고된 삶을 고즈넉히 전해주고 있었다.

그 골목에는 아이들이 깨서 치마자락을 웅켜잡고 ‘가지말라’고 보챌까봐 동틀녘 허물벗듯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어물창고로 종종걸음치던 아낙이, 구들장 아랫목에 넣어 둔 이불속 보리밥 그릇을 꺼내 보자기에 덮힌 개다리소반 위 푸성귀로 허기를 채운 뒤 해질녘 퀭한 눈으로 엄마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던 아이가, 붙박이로 굴껍데기를 까다가도 아이가 눈에 밟혀 물때에 각질이 덧진 손을 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둠이 내린 가풀막을 오르던 어미가 있었을 게다.

세월이 흐른 동피랑 비탈길의 발걸음은 그만큼 무거워졌다. 골목길에 새어 나오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겼다. 세월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늙은 발걸음들이 골목길에 처벅 닿는다. 그 발걸음은 몇발짝 못가 폭삭 주저 앉는다. 끓는 가래를 삭히고 몸을 일으켜보지만 힘없는 다리는 또다시 쉬었다가기를 재촉한다.

통영시는 늙고 지친 동피랑을 주거환경개선사업구역으로 묶었다. 동피랑 꼭대기 ‘배꾸마당’에 충무공이 설치한 옛 통제영의 동포루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그 주변은 공원을 조성할 방침이었다.

통영시 계획이 현실화할 때는 동피랑 전체가 허물어질 판이었다. 아낙들이 바닷 일을 나간 남정네의 배가 저멀리 ‘공주섬’을 끼고 ‘강구안(통영항)’으로 돌아오기를, 만선의 기쁨을 알리는 오색깃발이 그 배에 나부끼기를 가슴 졸이던 기다림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소이었던 ‘배꾸마당’이 사라질 위기이었다.

2007년 7월. 지방의제 추진기구인 ‘푸른통영21’은 동피랑을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문화 골목으로 재단장해 보자는 의견을 내놓고 통영시를 설득했다. 동포루 복원과 공원조성을 6개월만 미뤄달라는 것이었다.

‘푸른통영21’의 구상은 커뮤니티 디자인이었다. 낡고 얼룩진 시멘트 벽을 캔버스로 ‘그림이 있는 골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급한 것이 예산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 정부의 지역혁신사업 지원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사업신청일이 이틀 밖에 남지않았다. ‘푸른통영21’사무국은 밤을 꼬박 세워 사업신청서와 예산 배정서를 작성했다. 시간이 촉박한 터라 사업신청서를 긴급 우편으로 행정자치부 소관부서에 보냈다. 친신만고 끝에 예산 3천만원을 받았다.

이번에는 벽화를 그릴 사람들이 문제이었다. 2007년 10월26일~31일까지 ‘제1회 전국 골목그림 공모전’ 개최광고를 했지만, 참가신청 팀은 고작 한개 팀이었다. 알림광고가 늦었던 탓이었다.

사무국은 마감기한을 이틀 더 늦추고, 인터넷 미술동호회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낚시질’을 했다. 미끼는 대상 300만원이었다. 참가 신청팀은 19팀, 참가자 36명으로 늘었다.

‘하이고 가스나 너거들 이러고 댕기는 거, 너머 어무이 아부지가 알고나 기시나? 온 옷에 뺑끼를 묻히가이고, 이런 가시나들 꼬라지 좀 보거라이.’ 밑그림을 위한 페인트 작업에 한창인 여학생 팀을 보고는 ‘쯧쯧’ 혀를 차며 못마땅해 하던 할머니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집 베르빡(벽)에 항칠하지 말라’는 할머니들의 야단은 ‘아이들이 천재다. 천재! 어째 저리 곱그로 칠을 했다노?’라는 탄성으로 바뀌었다. 옆집 그림을 본 할머니들은 ‘우리집에 그림을 더 많이 그려달라’고 떼를 썼기도 했다.

진의장 통영시장도 화가로 나선 동피랑의 골목 벽화는 전국의 사람들을 불러 들였다. 주말이면 200~300명이 동피랑을 찾아 벽화에 카메라 렌즈를 대고 셔터를 눌러댔다. 관광객들이 연신 담 넘어 집안을 기웃기리고, 지붕에 올라가는 바람에 주민들은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동피랑 아래 중앙시장에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2년여가 지난 동피랑의 벽화는 서서히 바래고 있었다. 타지 사람들의 발길도 예전만큼 못했다. 사람들이 꼬여 성가실뿐 생활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벽화에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해지고 있다.

‘푸른통영21’은 올해 봄 벽화 그리기 공모전을 다시 벌이기로 했다. 배꾸마당 근처에 공판장도 만들어 주민들의 수익사업을 고려 중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동피랑의 현재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누군가는 주워야 할거 아냐? 그럼 동피랑 사람들을 시켜, 소일거리로 용돈벌이라도 하게.” ‘배꾸마당’을 마주한 집에 사는 이양순(73)할머니는 약이 오른다. 동피랑이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변했으면 보탬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발길질로 집앞 도로의 자갈이나 차고 지나가고, 옴팍 집 담벼락에 과자봉지나 쑤셔박고 돌아서는 관광객들이 못내 성가시다.

외지 손님들이 마뜩지 않기는 카페 주인(70)도 마찬가지다. 이름이 카페이지 한 평 남짓한 구멍가게에는 한잔에 500원하는 인스턴트 커피와 컵라면, 음료수, 과자 등이 물건의 전부다.

“나아질 게 뭐있어! 그냥 지나치는 골목길일뿐이다.” 주인장은 역정이다. 배꾸마당에 공판장이 생기면 그럭저럭 주민 수입도 생길테고 괜찮아지지 않겠느냐는 말에 “우리같은 놈팡이들한테 공판장이 차례나 오겠어? 어느 한 놈이 꿰차면 그뿐이지”라며 투덜거린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동피랑의 실상이다. 사실 동피랑의 벽화의 출발점은 현지 주민들의 공감이 아니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고있던 동피랑에 대한 외지인들의 감성에서 비롯됐다. 골목 벽화는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바깥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만큼 동피랑 안을 살피고, 주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통영시는 언덕 집 4~5채를 리모델링해 작업실로 예술가에 분양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예술가는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름있는 예술가가 들어와야 문화마을로 자리를 굳힌 동피랑의 폼이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푸른통영21’과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동피랑 골목 벽화의 주목받을 수 있던 것은 예술성이 아니라 공익성과 대중성에 무게를 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동피랑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다. 제2회 골목벽화 공모전이다. 주민참여가 없었던 제1차 굴레를 벗고 동피랑이 새롭게 진화할지 관심거리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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