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목원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석사학위논문의 제목은 ‘도시건축프로그램의 재해석을 통한 건축디자인 접근방법에 관한 연구’로서 베르나르 츄미의 프로그램 건축방법을 원용하고 있다. 인천 태생이며, 초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나왔다. 대헌공고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남들보다 앞서 건축디자인의 세계에 입문한 격이다. 대전에서의 유학시절, 대학에서 만난 근대건축역사학자 김정동 교수로부터 건축의 실존에 대하여 배운 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하대학교 동정근 교수 밑에서 현대건축의 디자인이론을 습득하면서 건축에의 눈을 뜨게 된 건축가다.

인천에서 청년건축가를 만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싶지 않았다. 국내외를 돌아보면 30대에 이미 건축가의 이름을 떨치는 이들의 수가 많은 반면 인천에서 실제 프로젝트를 운용하고 있는 동년배 건축가를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금양이 운용하는 정보망의 느슨함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학의 건축과 교수들로부터 추천받는 데에도 한계가 느껴졌다. 대부분 실력을 인정받는 예비 건축가들이 서울로 집중되거나,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런 와중에 김 소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었다.

김소장은 아직 건축사 면허가 없다. 그래서 처음 그와의 인터뷰 약속을 정할 즈음 그는 정중하게 거부의사를 비췄다. 아직 나설 계제가 아니라는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본란의 연재 의미를 되새기면서 어렵사리 그의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고은국, 전양숙 씨와 파트너십으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단출한 구성이다. 2007년 작업실 개념의 이관건축으로 출발하여 현재의 하운건축으로 발전, 상호도 변경되었다. 대학원 입학동기 고 대표와의 인연으로 인천에서 사무소를 개설하기 전까지 그는 서울의 간삼건축에 입사(2002~2004)하여 일을 배웠고, 이후 인천으로 건너와 에이스건축에서(2005∼2007) 근무한 것이 전체 이력사항이다. 역산하면 33살에 독립사무소를 가진 턱이다. 어떻게 가능했나?

“에이스건축에 근무하던 중 직접 설계한 숭의동 주택이 인천시건축상 주거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때 생각하게 되었죠. 남 밑에 있는 것보다 직접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이 계통에선 어린 축에 끼지만 그 땐 혈기왕성했거든요.”

전술했듯이 그는 건축사 면허를 따지 못한 것이 독립의지를 키우는데 발목을 잡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전의 간삼건축에서 익힌 파트너십 유형의 건축사사무소 운영의 방법론을 거울삼아 과감하게 업계에 진출한 것이다.

“소규모 건물을 기획, 설계, 시공까지 도맡아 하는 턴키 개념으로 운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설계경력이 짧으니 실적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초기에 설계비를 적게 받더라도 건축가가 공사현장까지 일일이 관리함으로써 건축주들과의 관계가 돈독해졌고, 결과적으로는 양질의 건물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집안 친척들의 집을 설계하고, 지어주는 것으로 발판을 다진 김 소장은 지역 내 시민문화단체인 해반문화사랑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알게 된 대학교수 선배로부터 주택설계 일을 소개받게 되면서 점차 사무소도 안정권에 진입하게 된다. 그 이전엔 유사 현상설계인 인터넷 하우빌드에서 주최하는 설계제안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어렵사리 설계 일을 따내는 등 작은 사무소의 설움을 스스로 극복했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시작한 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시행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 디자인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방법만이 살길이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에게 본보기로 삼는 선배 건축가에 대해서 물었다. 문훈. 대학원 조교 시절에 만난 그는 김 소장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한두 명의 스태프만을 두고서 독특한 디자인과 폭발적인 활동력으로 평범함을 거부하고 늘상 일탈의 자유를 만끽하는, 생동하는 건축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 청년건축가의 로망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라면, 김 소장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만의 특유의 정공법이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제껏 건축주와의 약속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김 소장이다. 당연히 건축주와 불협화음도 있을 리 만무하다. 그의 건축현장을 답사하는 그 날도 건축주가 요구한 자료를 챙겨서 나왔다. 남구 숭의동, 도화동 반경 2km 안에 그가 설계한 주택과 근생건물들이 집중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른바 ‘동네건축가’란 명호가 제격이다.

김 소장이 설계한 다세대주택과 홍원장댁-1, 2를 둘러보면서 그가 사용하는 건축어휘들이 기대이상으로 안정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직접 공사를 관장하다보니 소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정성이 묻어나 있다. 홍원장댁-1의 경우, 굳이 맥락주의를 들먹이지 않아도 좋을 만큼 기존의 동네 풍광에 어울리는 작은 매스를 분절시키는 방식으로 건축된 외관이 특별하다. 홍원장댁-2의 경우, 전문직 건축주의 편의를 내부공간에 충분히 수용하면서, 대지의 절반 이상을 열린 마당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이 오픈 스페이스는 이웃들의 시선에 자연스럽게 개방되어 있어 계절별로 시각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적-공적공간의 중간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좋아 보였다. 당장의 꿈은 건축사 면허를 취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 소장.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은 현상설계에 응모할 만큼 사무소를 키우는 것이라고 소박한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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