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달, 가냘픈 새 새명을 품은 어미가 감당해야만 했던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욕지기가 나서 배 속의 것들이 모두 거꾸로 솟았다.

속을 갈기갈기 훑었다. 몸은 널브러지고, 정신은 흐릿해졌다. 반복되는 토역질…, 그래도 밥술을 뜨고 기운을 차려야 했다. 내 몸뚱이가 아니라 배 속에서 움튼 씨앗의 양분 때문이었다. 1998년 10월13일, 말도 살 찌운다는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의 가을은 야윈 채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태아에 살이 붙으면서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처져갔다.

애써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몇 걸음 못사 만삭의 임신부는 숨이 고비에 찼다. 내리쬐는 뙤약볕, 그 곤혹을 고스란히 머리에 얹은 채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신음소리조차 몸에 부쳤던 그어미는 서릿발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제발 뱃속의 이 아이에게 만큼은 집 없는 서러움을 그만 겪게 해달라’고… 청학동의 여름은 사뭇 처절한 절규로 가득했다.



새 천년을 며칠 앞둔 1999년 12월23일. 청학동 임산부의 겨울은 더 없이 푸근했다. 티 없이 밝고 실한 아이가 가슴팍에 안긴 것처럼 희망이 품에 안겼다. 남보기에는 비록 누추할지라도 내 한 몸 편히 뉘울 수 있는 빌라 한 채, 노심초사 맥없이 내놓고 떠날수도 있었던 ‘나만의 궁전’도 지킬 수 있었다. 내 아이를 믿고 맡기고, 키울 수 있는 마을공동의 ‘공부방’도 전리품으로 얻었다. ‘사람을 만들어 가는 공동체 마을’, 그 달콤한 열매가 청학동에서 영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학교’로 통하는 청학동공동체는 이렇게 출발했다. 1998년 10월13일 오후 7시 주민 570여명이 청학감리교회 교육관에 모였다. 1991년부터 시작된 당시 인천시 공영개발사업단의 ‘청학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이 94%정도 진행돼 청산을 앞두고 있을 때이었다.

개발부담금이 문제이었다. 2천500만원짜리 46.2㎡ 빌라에 1천500만원의 개발부담금이 물려있었다. 165㎡규모의 단독주택도 문제였다. 감보율(36.4%)로 60㎡가 잘려나간 뒤 집 값(8천여만원)의 절반이 넘는 4천200만원을 역시 개발부담금으로 내놓아야할 판이었다. 청학동 마을 주민 1천300여세대개 짊어져야 할 개발부담금은 무려 50억원에 가까웠다. 당시 공영개발사업단은 24군데의 토지구획사업을 벌이면서 290억원의 잉여금을 남긴 상태였다.

주민들은 즉각 ‘청학동재산권수호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조목모목 따져나갔다. 청학동토지구획정리사업의 10가지의(34만1천460㎡)부당성을 끄집어 냈다. 지구안 중앙도로변과 문학터널 도로변 녹지 1만6천403㎡(27억원)이 주민들 몫으로 남아있었다. 지구안 7개 공원 1만500㎡도 마찬가지이었다.

주민들은 기반시설의 경우 공영개발사업단이 책임질 것을 요구하며 14개월간의 긴 싸움을 들어갔다.

“다들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했어요.” 당시 대책위원장이었던 윤종만(51·현 청학동공동체마을운영위원장)씨는 인하대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데모의 기술’을 배우던 아주머니들을 다독거렸다. “무작정 투쟁구호를 적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북과 장구를 두드린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는 싸움은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잘 어우러질 때 가능합니다.”

거리로 뛰쳐나갈 때는 과감했다. 400~500명이 모여 한 목소리를 냈다. 지쳐서 신경이 날카로울 때면 주민체육대회를 열어 흥을 돋궜다. 집회가 주춤할 때는 홀몸노인 돕기나 학교 성금 전달하며 ‘우리’라는 정을 쌓아가며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싸움하기 위해 만난 청학동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화합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공영개발사업단이 주민들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이다시피했다. 게다가 아직 팔지않은 체비지 169㎡를 내놓고 어린이 독서실과 공부방으로 꾸밀 건물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공영개발사업단과 연수구의 도움으로 3층 건물(연면적 178㎡)로 세워진 공부방은 청학동마을공동체의 ‘사랑방’이었다. 방과 후 기초생활수급과 한부모 가정, 차상위 가정의 아이들을 모았다. 아이들을 지도할 선생님은 자원봉사 활동가이었다. ‘공부방’는 인가가 나지 않았지만 학교로 성장했다.

마을공동체의 상징인 500년이상 묵은 ‘느티나무’아래에서 학예회를 열면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깨 춤을 추는 마을잔치로 연다.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가 구연동화 학습프로그램에 나와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엄마들은 미술심리치료 자원활동가 양성 아카데미 과정도 밟고 자격증을 준비한다. 마을공동체 청학동은 지금 평생학습마을 만들기에 도전 중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할아버지도 파지 주워 보태…

교육센터 건립 사회적기업 추진”

윤종만(51)청학동마을공동체운영위원장은 1989년 청학동과 인연을 맺었다. 온돌침대를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윤 위원장은 서울에서 월세부터 전세를 살다가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천을 둘러봤다.

손에 쥔 돈은 2천200만원, 부천의 빌라를 사려다보니 1천만원 모자랐다. 엄두가 안난 윤 위원장은 다시 인천으로 내렸왔다. 청학동 42.9㎡짜리 빌라와 수중의 돈이 맞아 떨어졌다.

“사실 빌라 값보다는 동네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에게 청릉산(청량산)의 ‘청’과 문학산의 ‘학’을 따서 만든 마을 ‘청학동’은 마치 ‘민초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사는 이상향’쯤으로 느껴졌다.

학생이나 노동, 빈민 운동의 근처에도 못가본 윤 위원장이 1998년 10월 ‘청학동재산권수호주민대책위원회’을 맡게 된 것은 청학동 마을 둘러보기를 한 까닭이었다.

청학동 사람들은 80%가 다가구 주택이나 빌라에 산다. 저소득층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가 남동산업단지의 직장에 나가면 아들은 혼자 놀기 일쑤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방과 후 학원을 가는 현대아파트 아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이들 공부방을 만들어 보자.’ 2001년 4월 윤 위원장의 바람은 이뤄졌다. 주민들의 요구가 공영개발사업단에 받아들여지면서 쌈지공원 대신 공부방을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건물만 있을뿐 내용물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주민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빌라에 사는 이들은 세대별로 1만원씩 걷어 내놓았다. 공부방 집기를 사는데 쓰라는 것이었다. 개인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컴퓨터와 복사기를 장만해줬다.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들 학용품을 사는데 보태라며 꼬깃한 5천원 한 장을 던져놓고 종종 걸음을 치기도했다.

방과후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공부방은 2003년 9월 57명으로 교장이 있는 ‘공동체학교’로 거듭났다. 1~3학년은 연경산반, 4~6학년은 문학산반으로 나누고 유급 교사를 두었다.

교장과 교사는 공동체마을운영위원회가 결정한다. 보육교사나 교사, 사회복지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 중 자원봉사활동가로 3년 이상 일한 사람들을 공모로 뽑는다.

연구구의 지원을 받는다지만 예산은 늘 빠듯하다. 무료로 하는 급식이다. 지난해에는 구 예산이 5% 삭감되면서 운영비 500만원이 부족했다. 따뜻한 눈으로 마을공동체를 바라보는 교수와 변호사, 공무원 등 운영위원 10명이 부족한 운영비를 보탰다.

공동체학교는 아이들에서 어른 교육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미술심리치료 교육과정을 밟은 자원봉사 활동가 20명 중 17명이 2급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외부에서 활동 중이다.

동아구연과 독서지도 아카데미도 열었다. 청학공마을공동체의 목표는 평생학습마을만들기이다. 아이들부터 어른, 할아버지·할머니까지 배움의 터가 활짝 열린 그런 곳이다.

운영위원회는 수인선 폐선부지에 주목하고 있다. 수인선 인천구간 중 유일하게 승객과 화물 노선이 모두 지하로 건설된다. 2만6천400㎡가 공터로 남는다. 위원회는 그자리 한 쪽에 교육센터를 만든 뒤 일터가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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