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션,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 찾기. 만 50세 이하의 연령대로서 자기 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축가. 인천의 건축디자인 기반이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작지만 강한’ 건축의 소망을 인천에 새기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인물을 찾아 나선다.

희망을 짓는 건축가의 꿈이 매양 같을 순 없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는 다름이 없다. 이번호에는 화려한 외연보다는 탄탄한 내실을 중시하는 자수성가형 건축가를 소개한다.

윤희경(49·삼희건축 대표). 최근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주요 경기장 신축을 위한 지명초청 건축설계경기에서 서울의 토문건축과 손잡고 수영전용경기장인 문학경기장과 배구경기가 열리는 송림경기장의 실시설계자로 당선됨으로써 축하사례를 받은 건축가다.

보기 드물게 금양의 취재수첩에는 본란의 인터뷰 대상 적격자로 그를 추천하는 여러 건축인들의 음성이 박혀 있다. 그만큼 인천에서 ‘디자인 한다’는 소리를 듣는 몇 안 되는 건축가로서 그의 존재감에 무게가 실려 있음이다.

인천기계공고 출신으로 인하대 건축과를 졸업한 윤 대표는 인천지역의 건축계를 양분하는 거대한 학맥의 중간지점에서 학연보다 소중한 건축가 본연의 역할을 찾는 것에 비중을 두고 살아간다.

그 바람에 때로 불필요한 눈총을 사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는 현재의 인천건축계가 너무 내부지향적이며, 건축사 직능단체 구성원들을 보호하려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대사회적 건축의 발언은 취약하고, 또한 지역사회 안에서의 건축사의 지위향상도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건축을 이끄는 단체는 길게 바라보고 대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건축계 내부에서 편가르기 식의 리더십보다는 입장을 달리하는 측까지 포용하고, 진정으로 인천건축을 위해 우리가 함께 무엇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병대를 제대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서울의 정림건축에서 실습을 시작한다. 이후 조성룡과 문정식이 이끌던 우원건축에서 본격적인 디자인 실무를 익히며, 경복여상 설계에 깊이 개입한 바 있다. 그곳에서 그는 선배 건축가 이종상과 만난다.

삼우설계, 우일건축을 거치며 건축디자인의 임상기를 행복하게 다진 그는 이문재의 미래건축이 참여한 부평문화회관 현상설계에 협력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당선을 시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윤 대표는 인천에서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고 건축사 면허를 딴 다음해인 1992년 삼희건축을 설립하게 된다.

고교 1년 시절, 일찌감치 건축가의 길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기에 궁금했다.

“신동흔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건축의장, 건축가의 꿈 등과 관련해서 그분의 가르침이 컸지요. 근사한 건축가가 되자는 목표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고등학교 때의 경험을 살려 1학년 때부터 선배들과 어울려 국전에 참가했지요. 졸업 후 우원건축에서 만난 이종상 선생으로부터는 자료에 의존하는 건축설계가 아닌 건축가 개인의 뚜렷한 건축철학의 산물로서 좋은 건축이 창조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진 건축가라는 강력 유전자는 고스란히 두 아들에게 대물림되어 현재 윤 대표의 첫째, 둘째 아들 모두 대학생 건축인으로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나름 성공적인 건축가의 삶을 빚어온 그였지만 자식세대가 똑같이 건축가로 성공한다는 것이 결코 순탄할 수만온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터라 대견함과 동시에 걱정이 따른다고.

그가 인천에서 빠른 템포로 건축가로 자리잡는 데는 우원건축 재직시절 경험했던 경복여상의 건축계획단계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섭렵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경복여상은 89년 당시 학교건축의 새로운 전형으로 평가받았을 만큼 수작이었는데,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인천지역 내 57개 학교시설을 내리 설계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던 것이다.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그는 일생일대의 외도를 경험한다. 건축설계업을 유지한 채 시행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단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초기엔 우역곡절이 있었지만 그의 외도는 그가 지금껏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사무소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한 기틀이 되어주었다. 현재까지 7개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대부분 그의 판단과 사업수완이 도드라진 성공적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적 안정이 좋은 건축을 생산하는 기반이라는 것을 몸소 익힌 것이다. 그 과정에서 획득한 사회활동의 각종 타이틀도 20, 30여개에 달한다.

“그러다보니 사실 지금의 저는 디자이너라기보다 경영자에 가깝다고 할 밖에요. 그래서 오래전에 도입한 것이 건축파트너십입니다. 부평역사박물관, 검단선사박물관 등을 설계경기를 통해 당선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된 셈이죠.”

현재까지 삼희건축 출신으로 배출된 건축사만 14명, 그 기록만으로는 인천 최고를 자부한다며 윤 대표는 환하게 웃는다.

비결은? 프로젝트의 다양성과 많은 디자인 경험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독립 후, 다들 잘 되었나?

“신진 건축가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습니다. 지금 사회는 갓 사무소를 개업한 이들에게 다짜고짜 실적을 요구합니다. 그나마 일이 많은 관청 상대 입찰 프로젝트의 경우 설계자 적격심사 등등해서 족쇄를 채우기 바쁘지요. 건축설계의 특성상 아이디어 단계로부터 디자인, 작품으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죠. 건축가를 수주실적을 중심으로 한 기술자 취급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당장 입찰제도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설계경기가 많아져야겠지요.”

매번 디자인하면서 그 안에 자기 영혼을 빠뜨리기를 반복해왔다는 윤 대표, 그가 건축주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온 이유다.

전진삼(건축비평가, 격월간 건축리포트<와이드>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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