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5시30분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평화의원 앞. “왜 거기서 나와요! 어디가 안 좋아요?” 외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임 할머니(67)는 왼손에 약봉지를 들고 조심조심 의원 현관 문을 나서는 문모 할머니(68)를 보고는 화들짝 놀란다. 이내 임 할머니는 종종 걸음을 치더니 눈 길을 살피며 엉거주춤 발을 떼는 문 할머니의 팔짱을 끼며 납작 힘을 쓴다.

“아이고! 디스코(디스크)가 왔는지, 말도 못하게 아프네…” 목을 가볍게 돌리던 ‘반(半)의사’ 문 할머니는 어리광 섞인 콧소리로 전날 밤부터 의원을 찾기까지의 일들을 소상히 고한다. “저녁을 잘 먹고 잠 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이 뻐근하더라구, 점심 때가 지나면서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의사양반한테 진찰받으러 왔지 뭐야… 근데 길도 미끄러운데 웬 마실이야? 몸 조심하지 않고…” 방금 전의 ‘말도 못할 아픔’을 까맣게 잊은 듯 한참동안 서서 수다를 떨던 문 할머니 그리고 문할머니의 응석을 싫은 내색없이 맞장구치던 임 할머니, 어느 새 두 노인은 ‘팔짱’에 서로를 의지한 채 어슴푸레한 저녁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평화의원 앞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꽃에서 좋은 향만를 뽑아 억지로 섞어 만들어 공기 중에 날라가 버리는 엑서서리 같은 향수가 아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힘들고 지칠 때 넌지시 손을 내밀고 어깨를 감싸주는, 그래서 쉽게 사려져버리지 않는 정(情)의 향기다.

부개동의 의료기관 1호인 평화의원의 탄생도 그러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89년. 이름 그대로, 서울서 부평에 닿을 때 맨 먼저 발을 내딪는 마을이 ‘부개동(富開洞)’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형편은 까마득했다. 섬유가죽와 가죽신발, 기계장비 등 영세 공장 등에서 직공이었던 부개동 희망촌 사람들은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 부대껴야만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치고 깨져도 고용주에게 하소연도 제대로 못한 채 꾹 참고 일을 해야만했다.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임종한(50)교수 등 기독교청년의료인들이 뭉쳤다. 40명이 공동출자해 노동자 진료병원을 깃대로 ‘평화의원’을 세웠다.

젊은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인들이 당시 할 수 있는 노동운동의 한 수단이었다.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우기는 고용주들과 맞서는 ‘다친’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산재를 받을 수 있는 지를 고민하고 상담하고 간단히 치료를 하는 ‘상담소’노릇을 했다.

민주화의 싹으로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의료상담이 주를 이루었던 의료인들의 노동운동의 방향도 바뀌어야만 했다. ‘세상 속에 뛰어들어 의료 소외가 없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 처음에는 불가능한듯 보였다. 마을 주민들은 당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만나고 또 만났다. 구슬리고 설득했다. ‘의료의 주체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주민이 주인인 병원을 차리자.’ 의료생활협동조합이었다.

1996년 11월 주민과 의사 80명이 한 구좌당 3만~15만원을 출자해 ‘인천평화의료생협’을 설립해 평화의원의 운영권을 주민들에게 내놓았다.

환자는 더 이상 의료진의 일방적인 치료를 받는 고장난 기계가 아니었다. 환자는 돈 벌이의 수단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의사의 지시대상이 될 수 없었다. 되레 병원은 인간존엄을 치켜세우는 ‘복지센터’이었고, 의사는 먼저 환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심부름꾼’이었다.

의료생협은 먼저 주민들이 병을 얻기 전 건강한 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예방의료에 나섰다. ‘건강한 마을 만들기.’ 형편이 넉넉지 않은 주민들이 건강을 지킬수 있도록 하는 ‘걷기’ 프로그램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걸으면서 동네도 알고, 주민들간 얼굴을 익혀 부개동에 정이 쌓도록 하자는 궁리이었다.

“처음 2~3년 동안은 주민들이 모이지 않아 애를 먹었죠.” 의료생협 송영석(45)사무국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시어머니가 아파서, 전날 술을 먹어서, 날씨가 추워서…’ 별 핑계를 대면서 걷기모임에 나오지 않는 주민들로 혼자 마을을 돌아야 할 때도 허다했다.

“혼자 힘껏 일하는 모습이 측은했던지,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 둘씩 주민들이 모임에 나오더라구요. 이제는 내가 챙기지 않더라도 주민 20여명은 매주 토요일 전국을 다니며 산행을 해요.”

부개동의 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주민 스스로 걷기를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식이요법과 호흡법을 익혔다. 걸은 뒤에는 만보기를 보고 혈당과 혈압을 체크했다.

걷기로 출발한 건강마을 만들기는 탁구와 노래, 체조, 댄스 교실 등 건강 소모임로 퍼져나갔다. 아침 체조교실에는 주민 20~30명이 어김없이 매일 얼굴을 비친다. 같은 프로그램이 주민자치센터에도 있으니 그곳에 가서 운동을 해라고 해도 굳이 의료생협의 프로그램을 더 찾는다.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소통의 정이 쌓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민 스스로 마을 축제를 벌이고, 알뜰시장도 연다.

인천평화의료생협은 조합원이 1천800세대로 불어났다. 한의원과 방문간호센터, 가정간호사업센터 등을 개설했다.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36명이 움직이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여보세요 곧 가겠습니다”

김석중 평화의원 2진료실원장

가정의학전문의 김석중(40)평화의원 2진료실원장이 의료생협 3층 사무실에 불쑥 나타났다. ‘진료가 없나봐요?’ 송영석(45)사무국장의 말에 ‘예, 대기하는 진료환자가 없어 잠깐 올라왔어요”라며 사무실 밖 베란다로 냉큼 나간다.

평화의원의 의사생활이 궁금했던 터라 김 원장을 만나러 베란다로 나갔다. 그의 손가락에는 벌써 담배 한대가 꽂혀있었다. ‘아니, 그 해롭다는 담배를 의사가…’ 비아냥 섞인 농담에 김 원장은 머쓱해하면서도 이내 말을 받아친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이리와서 같이 한대 피우시죠?” 김 원장의 살가움은 평화의원 의사로 7년 동안의 이력에서 나온 넉살이었다.

그는 군 의무관으로 제대한 뒤 인하대의대 선배인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명인(44)1진료실원장의 권유로 곧바로 평화의원에 들어왔다. 물론 생협이사인 주민의 면접을 보고나서다. 쌀가게 아저씨처럼 생긴 의사, 석중씨의 철학은 철썩같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 누구나 공평하게 누려야할 공공재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 막걸리 주전자를 놓고 선배들과 ‘의료생협’을 놓고 고민하면서 그의 머릿속에 박힌 인생의 방향타다. 환자에게 부담이 많은 비보험과 과잉진료를 자제하는 ‘건강한 주치의’로 남는 것이다.

자처한 평화의원 의사이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환자와 병원 주인이 주민이다보니 별별 간섭도 많았다.

‘가운에 때가 많이 끼었다느니, 머리를 감지않아 떡이 졌다느니…’ 애교로 받아들이며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2진료실김 원장이 처방하면 감기가 잘 낫지 않는다, 약도 적게 준다.’ 자존심이 살짝 상하기도 했지만 웃어 넘겼다. 의사는 병을 잘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생활습관을 고치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환자와 더 많은 소통을 해야만 했다.

그는 요즘 보기드문 ‘왕진’을 나선다. 감기나 몸살에 걸린 조합원들도 투정부리듯 방문 진료를 고집한다. 오전 외래환자 50여 명을 진료한 뒤 오후에는 환자들을 찾아 가정을 방문한다. 그러고는 자신도 못하는 운동과 체중관리, 금연·금주 등 생활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며 환자를 꾸짖는다. 한참의 진료와 상담끝에 환자는 ‘왕진비가 없다’며 돈 대신 은행과 꿀을 줄 때도 있다.

계양구 작전동 한림병원에서 내과 전문의로 일하는 아내는 가끔 ‘왜 이렇게 사느냐’며 타박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평화의원 의사가 좋다. 동전으로 플라스틱 병을 가득 채운 저금통을 ‘어려운 노인들에게 써 달라’며 쪽지를 놓고 조용히 사라지는 따듯한 이웃이 그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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