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국어학을 공부하려 했다.

외부 환경 요인으로 국문학으로 바뀐다.

차츰 문학평론쪽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이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몸은 실천적 삶으로 이동해간다. 어느새 인천지역 문화운동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공부로 방향을 틀어본다. 해서, 다다른 것이 이번엔 인천 문화담론들의 이론적 뒷받침을 위한 연구다. 자연스럽게 인천학으로 넘어간다.

현재 시점에서 인천공부에 온 시간을 쏟는 이로는 김창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이 단연 돋보인다.

인천이라는 지역 자체를 화두로 하는 직업적 연구자의 선봉에 선 그다.

인천학이야말로 이 지역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학문이라고 단언한다. 이 도시의 가치를 밝혀내기 위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는 계속 밟아나갈 것이다.

▲국어학, 국문학, 그리고 문학평론

‘인천공부 길에 나서게 된 동기의 절반은 한국 근대의 발신지를 파헤쳐보겠다는 호기심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인천과 인천사람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나의 태를 묻은 고향은 아니나 약관에 이거한 이래 이 도시에서 보고 배운 덕택에, 그리고 인천에서 만난 사람들의 깨우침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최근 4~5년간 김 박사의 연구 궤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저서 ‘인천공부’ 머릿글에서 밝힌 소회다.

글로 썼듯이 그가 인천에 온 것은 지난 1978년 인하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하면서다.

고교시절까지 안동에서 지낸 그가 뜻밖에 인천을 택한 것에 대해 김 박사는 숙명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 조부가 아호를 바다 어덕이라는 뜻의 ‘명파’(溟坡)로 지어주셨어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언제부턴가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지요. 동기 중 인천으로 진학한 이는 드물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었고 국어학을 하고 싶었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오니 문과대가 개설되면서 사범대학을 통합, 국어국문학과로 바뀌어 있었다.

“사범대 시절과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국문학으로 넘어갔지요. 그 이전부터 소설습작을 몇 편 써놓았거든요. 인하문학상에 투고하기도 했습니다.”

출강나온 문학평론가로부터 소설을 쓰는 것보다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듣는다. 지도교수도 여기에 의견을 더했다. 대학 4학년때였다. 대학원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두 사람이다.

▲지역민주화 운동으로

“문학연구자들은 시간적으로 과거에 중심을 두고 분석을 해나갑니다. 반면 문학평론은 당대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풀어야 할 과제가 과연 무엇인가를 함께 고민 합니다. 사회적 관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죠.”

운동권 출신과는 달리 뒤늦게 공부를 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실천적 삶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게 일었던 80년대 후반이었다. 인천민주화실천협의회에 적을 둔다.

이어 인천민중연합이 결성되면서 합류, 시대의 고민을 풀기위한 행보에 동참한다.

“주로 문학관련 일이 나에게 떨어졌습니다. 문화교실을 디자인한다거나, 중구 신포동 한 화랑에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민중미술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문화 담론 이론적 뒷받침을 위해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살았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덮어 둔 상태였거든요. 끝을 봐야지요.”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틈틈이 대학 강의를 나가며 몇 해를 정신없이 보냈다. 논문을 준비하느라 몰두하고 있는데 지인이 던진 말이 그만 마음에 와 박혔다.

“공부를 해서 뭐해 먹을 거냐고 묻더군요. 지식을 쌓아 다른 이들처럼 대학 강단에서 안주하려 하느냐, 그보단 학문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 아니냐 하는 질책과 격려가 내포된 말이었습니다. 논문 쓰는 내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근본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고민 끝에 택한 것이 인천민예총 산하 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자리였다.

“문화 담론이 무성한 시기였습니다. 이야기는 많지만, 그를 뒷받침해줄 이론적인 근거는 비어있는 채였죠. 이를 채우기 위해 인천의 문화 자료들을 수집하고 실태를 조사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1년동안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자료들을 긁어 모아 다섯권을 묶었다.

인천시민문화, 시민문화향수, 노동자 문화, 문화예술인·단체에 대한 각각의 실태조사 그리고 문화정책 및 지자체 문화지표조사를 완성했다.

그 다음에는 인천문화예술사 데이터베이스 사업에 시선이 갔다. 개항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문화예술 관련 일체의 자료들을 모으는 작업이었다.

자료를 목록화하고 중요부분은 직접 입력해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큰 작업들이었습니다. 비로소 인천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이전보다 훨씬 깊게 공부가 됐습니다.”

▲“인천학을 세우자”

“21세기 추세로 볼때 인천이라는 대도시는 세계와 직거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 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인천학이란 바로 지역의 생존을 위한 학문이지요. 이를 발판으로 특성화와 차별화가 가능합니다.”

인천학 연구의 중요성을 짚는다. 원년부터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에서 일해온 그다. 2004년부터는 상임연구위원으로 ‘나홀로’ 고군분투해오고 있다.

“인천학이야말로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문학, 사회학, 지리학 등을 망라한 종합 학문입니다. 파트별 연구실 체제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다보니 상임연구자도 줄어든 상태입니다. 인천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연구자들이 모였던 출범 의미가 무색해졌지요.”

센터로 제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모여야 하는 것은 필수라고 지적한다. 안정적인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희망은 있어요. 인천시장이 이번 선거공약으로 이곳을 부설연구소 수준을 넘은 재단법인으로 발전시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겠다고 공표했거든요. 고무적이죠.”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중요한 구성부분이 문화콘텐츠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 성과가 문화도시로 발전하는 기초가 됩니다. 투자를 소홀히 하거나 늦춰서는 곤란합니다.”

상임연구위원으로 3년여동안 많은 일들을 해냈다.

분야별 인천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를 개괄하고 총 점검해 개설서격인 ‘인천학 현황과 과제’를 묶었다. 또 하나, 방법론적 탐색이 인천기행문 연구 ‘인천학의 원근법’이다.

자료총서도 3권 냈다. 강화지역 읍지를 번역한 ‘여지도서 강도부지’, 일본서를 번역한 ‘1903 인천’과 ‘인천의 긴요문제’는 지난해부터 올해에 걸친 성과물이다.

지역의 제반문제를 짚는 인천학세미나도 어느새 29회를 찍었다. 숨 쉴 겨를도 없이 달려온 세월이 있어 가능했다.

▲“정체성의 핵심은 해양성”

인천학이란 결국 인천이 어떤 도시인가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정의까지 포함돼 있다고 김 박사는 푼다.

“내 나름대로 내린 중간 결론은 인천이란 도시의 정체성의 핵심이 해양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천의 모든 것을 가늠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또다른 인자로는 근대 개항문화, 산업도시, 강화의 고려문화 그리고 농경문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을 아우르는 융합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해양문화 융합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천이 한국근대의 실험실이었다는 역사적 가치에 천착한다면 문명사적 변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천에는 한국사 전체가 고스란히 압축돼 있어요. 어느 한 지역을 집어내도 이야기가 들여다보입니다. 자유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천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신미양요, 그리고 한국전쟁의 현장이었습니다. 인천이라는 도시가 점점 더 매력으로 다가오는 이유이지요.”

연구자가 내린 결론운 이렇다. “인천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압축파일을 계속 축적해가는 작업이야말로 충분히 가치있는 일입니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 @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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