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갑로(尹甲老) 시장. 그는 인천이 직할시도 광역시도 아니었던 1965년 2월1일부터 1966년 7월11일까지, 1년5개월 남짓 제12대 인천시장으로 재임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초상은 인천시청 대회의실 벽에 역대 시장들의 것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가 단순한 인천시장이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관선, 민선 역대 시장 29명 가운데 단 한 명 ‘진정한 문화인, 예술인’ 시장이었다는 기억 때문이다. 그 자신 아마추어 미술가이기도 했지만 인천 화단(畵壇)에 남긴 공적과 인천시에 재임하면서 ‘오직 인천을 위해 펼친 대의(大義)의 예술 행정’은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할 일이다.

“오소회(五素會) 멤버는 미술인들이 대거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겨 갔던 60년대에 인천에서 미술 발전이라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가졌던 이들이 만든 미술 동인이다. 박응창(朴應昌), 김영건(金永健), 이경성(李慶成), 윤갑로, 우문국(禹文國) 등은 당시만 해도 변변한 전시장이나 화랑이 전혀 없었기에 신포동, 은성다방을 본거지로 삼고 이곳에 모이고 이곳에서 미술전을 개최했었다.”

이 글은 인천 출신 미술평론가 김인환(金仁煥)의 ‘고여, 인천 화단의 산증인’이라는 논평문에 나오는 대목으로, 아마추어였지만 윤갑로 시장의 미술 동인 활동을 보게 된다.

윤 시장은 1913년 경기도 장단면에서 출생했고, 학력은 경성농업학교(京城農業學校)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전, 경기도 장단군농회(長湍郡農會) 기수(技手)를 시작으로 오랜 경기도 공무원 생활을 거쳐 마침내 1965년 인천시장으로 부임한다.

그가 인천시장으로 와서 인천 문화계에 끼친 공적은 매우 큰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나라 전체가 아직 빈한한 지경이어서 문화 인프라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지만 윤 시장은 이 때부터 인천의 문화계에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가지정 사적 211호인 서구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에 대해 특별예산을 들여 보존토록 한 사람이 바로 윤 시장으로 그는 이처럼 문화 예술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손을 댄 것들이 모두 오늘날 우리 인천의 문화, 역사의 체계를 잡는 데 기초가 되고 있다.

1965년 최초의 ‘시민의 날’을 탄생시킨 것이나 1966년 5월 정식으로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창설한 것, 그리고 1965년 인천시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1969년 우리 손으로 집필한 최초의 ‘인천시사’ 상하권을 발간한 일 등은 모두 윤 시장이 거둔 문화적 성과였다.

이 밖에도 그는 재임 동안 많은 문화 사업에 손을 댔다. 매거(枚擧)할 수는 없으나 한 예가 이종화(李宗和) 선생의 사진집 ‘문학산’의 출간이다. 이 사진집은 인천으로서는 참으로 소중한 자산이면서 윤 시장의 훌륭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윤 시장이 문화 행정, 문화 인프라 구축에 열심이었던 사례는 1946년 무렵, 벌써 강화문화원의 터를 닦았다는 데서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생각한 문화는 인천의 정서와 인천의 정체(正體)를 담는 문화였다는 점이다. 진정 인천시민을 존중하고 인천을 사랑하는 문화 정책을 펼쳤던 윤갑로 시장. 그리고 그는 인천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신포동 시장 백항아리집에서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과 따듯하게, 그리고 진심을 열어 교류한 유일한 시장이었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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