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선은 영상, 설치, 퍼포먼스, 평면 등 오늘날 시각예술의 범주 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미술의 여러 장르를 종횡하며 자신의 작업적 지평을 확장시켜왔다.

오늘날의 미술이 탈권위, 탈장르라는 모토 하에 신체 또는 매체의 심리적·사회적 수용패턴과 인식과정을 창작적 사유의 중요한 동기로 상정함을 볼 때, 박정선의 이러한 작업적 사유는 매우 설득력 있는 접근방식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작업은 미술에서의 공간성과 시간성, 즉 고정된 공간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간 사이에서 예술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그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 요소로 보기보다는 양자가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작품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적 서사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보여진다.

최근 박정선은 작업장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방사형태로 물감을 뿌려(dripping) 확산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화면 중앙부의 ‘○’형태는 형식적으로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과 차별성을 두기위한 작가의 전략일 수도 있으나 외계의 어떤 가치와의 연관을 시각화하기위한 최소한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언표라기보다는 화면 안에서 제약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외계와 연락하고 있는 미확정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표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다소 의외의 설명인데,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무규정한 미지성과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넋두리이자, 대상(물성) 스스로가 생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한 언술로도 받아들여진다.

이때 느껴지는 힘의 파장은 캔버스의 사각틀에 의해 제어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이는 현상들의 본질, 즉 동일한 현상들의 두 가지 고유성인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움직임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쏠리고 있는 선들의 유희, 그리고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울리며 점차 그 농도를 더해가는 검은 색의 울림 같은 것일 게다.

이 진동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현상의 본질이 현현된다.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자기를 자기로 정립하고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한정하는 가운데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모순적 위치에 놓여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박정선의 그림에 나타나는 노동의 흔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바깥세상의 현상으로부터 영양을 섭취하여 그것들로부터 자극받아 사물의 울림을 듣고 공명하여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외롭고 처절한 시간과의 싸움과 육체적 노동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캔버스 상에 칠과 덧칠을 수회 반복하고 다시 에나멜 물감으로 드리핑하고 형상을 만들어 가는 그의 작업 과정은 엄청난 장인적 노고와 예술가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한 사유는 고백적인 것도, 분노의 표출도 아닌 내면적 실재에 관한 어떤 의미망의 표현 같은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도시, 인간, 자연이라는 상징성을 함의한다.

실재를 관념화하고 이를 다시 구체화하는 일은 이중의 노고일 것이다. 박정선은 형태가 분명치 않고 혼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포착할 수 없는 형식으로 실재의 현상을 표현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무한 영역에 스스로 자신을 던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인천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젊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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