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션,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 찾기.

만 50세 이하의 연령대로서 자기 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축가.

선정기준치고는 그닥 힘든 취재여정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지역 안에서 그들을 만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다.

300여 인천광역시건축사회의 회원수만 놓고 보면 의아스러운 진단이랄 수 있겠지만 그들의 건축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의 건축전문매체가 부재한 까닭으로 자료집적의 기반이 부실한 것이 한 이유다.

리포트 초반, 필자의 시선이 인천광역시건축상 역대 수상자의 목록을 뒤지는 일에 닿아 있는 까닭이다.

손도문(43, 비타그룹건축사사무소 대표). 최근 그의 사무실에는 대학 후배가 파트너 소장으로 새로 영입되었다.

늘어나는 외부일로 바빠진 만큼 디자인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컸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앙무대에서 디자인 능력을 인정받던 후배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판짜기의 구상에 돌입한 그다.

요즘처럼 불황기에 남들은 위로부터의 구조조정을 당연시하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돌아온 답은 간단명료했다.

2010년을 건축과 인테리어를 아우르는 디자인그룹으로 재도약하는 기점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우선은 베트남에 진출해있는 인테리어 법인의 확장을 강구할 예정입니다. 현재는 명목상의 법인 성격이 강하지요. 그쪽에 진출해있는 법인장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만큼 그에 따른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국내 시장, 특히 인천 내 작업량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해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지역 건축계에서도 점차 외국 설계시장을 엿보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공통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대표는 인천광역시건축사회에서 ‘전문MC’로 통한다. 다년간 인천건축문화제의 전담 사회자로 활약해오며 얻은 별명이다. 그만큼 대인관계에 주저함이 없고 입담이 좋다. 더욱이 겉으로 풍기는 인상에서 예술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늘 파마 끼가 돋보이는 사자머리 헤어스타일은 그만의 페르소나로 여겨질 만하다. 일부러 스타일을 만드는가? “건축가라는 직업과 스타일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수염도 길러 보려고 했는데 조금 지나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어서 그것은 폐기했지요.”

제물포고를 졸업하고 국민대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석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2000년엔 경희대 대학원건축공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드물게 보이는 디자인 능력을 겸비한 학구파 건축가다. 그가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1991년)에 박춘명의 예건축에 입사하게 된 것과 맞물려 생각해볼 수 있다. 박춘명 선생은 1959년 일본에 유학중 김수근, 강병기 등과 연합팀을 구성하여 남산국회의사당 설계경기의 당선을 이끌었던 중심인물로서 여의도 63빌딩의 국내 설계권자이기도 한 1세대 한국현대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평가된다.

손대표는 그의 문하에서 사무소 건축 및 상업건축의 디자인수법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1997년 건축사 면허를 딸 때까지 줄곧 예건축에서 건축가로서의 몸을 만들었다.

“건축사 면허를 따던 그 해 말, 외환위기가 도래했지요. 제가 다니던 예건축 또한 구조조정을 피해갈 수 없었고, 저의 위치가 동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아주 애매한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결심했어요. 동료를 치느니 내가 나가자. 남들보다 빨리 건축사 면허를 땄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1998년 친구와 함께 삼주건축의 이름으로 동업을 하다가 4년 뒤, 2002년 현재의 비타그룹으로 독립, 고향 인천에서 본격적인 건축설계사무소를 개설하게 된다. 비타그룹의 비타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나? “비타민의 ‘비타’(Vita)가 하나의 뜻입니다. 이태리어로 비타는 ‘인생, 삶’을 의미합니다. 한자로는 ‘飛打’라고 씁니다. 처음부터 각각의 의미를 새기고 지었다기보다는 세상에 비타민과 같은 건축을 하자는 평소의 지론이 이름으로 승화한 것이고, 한자와 이태리어의 의미는 뒤늦게 찾아진 것이지요.”

2008년 인천광역시건축상 일반건축물 부문 장려상을 수상한 계양구 서운동 187번지 소재 인천교구 서운동 성당을 돌아봤다.

성당 앞으로 흐르는 굴포천으로부터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하천의 기운을 대지로 연결하는 회오리의 형상을 건물의 외관을 비롯, 성당 내부공간으로까지 연결시키려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건축당시 사제로 재임하던 김영묵 신부의 당부도 한몫을 거들었다고 했는데 말인즉, 성당의 존재는 살길을 찾아 떠도는 물고기들을 낚는 그물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던 것. 교회건축 설계에 일가견이 있다는 서울의 유명 설계사무소가 포함된 6개사의 지명현상설계를 통해 손대표의 현재의 안이 신도들의 투표를 통해 2개 안을 뽑는 최종심에 들었고, 마지막으로 사제의 낙점으로 영광을 안은 것이다.

서구 마전동 19블럭에 위치한 보미골드리즌빌을 찾았다. 노유자시설인 이곳은 얼핏 보기에 고가의 주상복합아파트의 인상이 강하다. 이 건물은 노인복지법에 근거하여 상업지역에 지어진 노인유료주택으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분양되는 아파트형 주거형태로서 건축 시 주택법을 준용하여 짓되 전매제한이나, 대출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전원이 아닌 도심에 지어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노인주거양식으로 최근 부상되고 있는 건물유형이다. 어떻게 이 같은 건물의 설계를 할 수 있었나? “이제는 앉아서 건축 설계 계약을 하는 시대가 아닌 것 같아요. 발로 뛰면서 기획단계로부터 설계, 시공 및 분양까지 동시에 고민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죠. 호흡을 맞추고 있는 시행사들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력서를 받아 들었다.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유네스코 인천시 북인천협회 운영이사, 인천발전연구원 비상근 연구원 등등 건축내부일은 기본이고 바깥에서까지 활동이 크다. 좋은 건축으로 건축가의 역할을 도시에 드러내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다부진 의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와의 반나절 동행은 끝을 맺었다.<계속> 전진삼·건축비평가 격월간 건축리포트<와이드>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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