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초대 교육감은 황광수씨로 학무과장(사회과장 겸임)으로 재임하던 1952년 교육청이 시에서 분리되자 초대 교육감으로 취임하여 2대 교육감까지 지냈다. 황 교육감은 서울출신으로 1900년 9월 24일생이며 1971년 3월 28일 별세(70세)하셨으니 더 사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황 교육감은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거주하시다 세상을 뜨셨다. 장지는 인천시 남구에 위치한 문학경기장 정문 맞은편 승학산 남향에 자리하고 있다. 묘지 면적은 대략 200㎡(60평)정도로 비교적 잘 조성된 묘역이다. 그러나 5, 6년 전 문학약수터로 등산하다 우연히 살펴보다 뫼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문학주민을 통해 사연을 알아본 즉 유족들이 묘지관리가 어려워 화장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따님만 네 분(영희, 영옥, 영만, 영화) 을 두셨으나 모두 70을 넘었을 터이니 이해가 된다. 지금은 묘비(學生平海黃公光秀 之墓)와 상석(床石), 묘비 좌우편에 석주(石柱) 하나씩 서있으며 묘비 뒷면에는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경기제일고등보통학교졸업 ▲경기도훈도교장, 시학학무과장 ▲인천시교육감, 교육장 ▲경기도정자문위원회 위원장 ▲경기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 ▲경기일보사 초대 사장 역임 등이다.

황 교육감은 서울 경기 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그 해 금산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을 시발로 교육계에서 교육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기기도 한 분이시다. 1960년 잠시 교육계를 떠나기도 하였으나 1962년에 인천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1964년에는 인천시교육청 교육장을 복귀, 1965년 정년 때 까지 복무했다. 1961년 7월 1일부터 1963년 2월 6일까지 약 19개월간 대한건설협회 경기도지부 초대 사무국장으로 부임하여 가장 어려웠던 시절 건설업의 질서 확립은 물론 건설업자의 권익보호 및 경영합리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신 분이시다. 1966년에는 인천시 중구 신포동 18번지 국제빌딩 사옥에서 경기일보를 창간, 초대사장으로 추대되어 지역신문으로의 구심 역할을 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론사의 일대 순환기를 맞으면서 1973년에 경영상 이유로 경기일보와 경기매일, 연합신문의 경기신문으로 통합되기전까지 5년여 언론사의 사장직을 마지막으로 공 사직을 모두 마감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자료에 의하면 1920년 인천문학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교육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37년 왕징초등학교, 신흥초등학교를 거쳐 1945년 부평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약 8년간 외유하기도 했지만 광복 후 인천부의 초대 학무과장으로 취임하여 공백기의 인천교육을 수습하는데 전력을 다하였고, 1951년 전란 시에는 학무과장과 사회과장까지 겸임하기도 하였다.

황 교육감은 1971년 3월 28일 작고할 때까지 생애의 3분의 2이상을 인천교육계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시다. 항상 인자(仁慈)하고 자애(慈愛)하였던 교육자이시다.

故 김길봉 인천문화원장은 시간은 가는건가 오는건가의 수상집에서 교육계의 출신들을 소개하면서 초대 인하대 최승만(崔承萬) 학장, 사범학교의 최봉칙(崔鳳則) 교장, 제고의 길영희(吉英羲) 교장, 공고의 김종무(金鍾武) 교장, 동산고의 남상협(南相協), 송도교의 김연우(金演祐), 영화여중의 유홍수(柳洪秀), 인고의 이인관(李仁寬), 여고의 조경래(趙慶來), 인여중의 김병철(金炳喆), 황광수(黃光秀) 교육감, 조석기(趙碩基), 조운준(趙雲濬), 음세정(陰世貞), 김광수(金光秀), 김신삼(金愼三), 황정순(黃貞順), 정상진(鄭尙鎭), 박창례(朴昌禮), 김만옥(金萬玉), 이만호(李萬豪)씨 등 기라성 같은 교장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 교육감은 많은 인재양성을 위하여 공헌하였으며 사회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함으로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후에 좋은 평가와 칭송을 받고 한 세상을 하직한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내년 3월이면 39주기가 되는 해이다. 다시 한번 그 분을 추모하며 그 고매한 인품을 기리 기억에 남도록 비석이 잘 보존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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