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을 돌아 다시 찾아온 마음의 고향.’

인천에서 유년기와 청년기을 보낸 인천상공회의소 이인석 상근부회장(66)에게 있어 ‘인천’은 이런 곳이다.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힘겹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래도 그는 인천이 어머니 품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굳이 조상 대대로 인천 문학동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힘든 시기를 이길 수 있도록 꿈과 희망을 심어준 도시요, 우리나라의 가능성을 느끼게 해준 곳이 바로 인천이란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00년, 수년간의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인천발전연구원장으로 다시 인천을 찾았다.

대학 졸업 후 30년 동안 외지에서 생활하던 그가 인천으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린 셈이다.

코트라에 몸담으며 해외 각지에서 활동했고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면서는 국정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도 키웠다.

언젠가는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인천으로 되돌아가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에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이 부회장은 자신의 다양한 경력을 인천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인천을 떠나 있던 세월 동안 자신이 보고 배운 것들을 인천을 위해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천을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만큼 내 고향 인천을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이다.

‘인천에는 현재 초점이 필요하다’는 그는 시민들의 역량이 하나로 뭉칠 때 건전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인천을 변화시킬 에너지를 창출할 ‘발전소’ 건립이 시급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수수께끼 같은 도시 인천, 인천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이 부회장을 만나봤다.



-인천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지만 이후 다양한 활동을 벌이면서 지역을 떠나 있었던 시간도 짧지 않았다. 이 부회장에게 있어 인천은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말해 인천은 저에게 희망을 주는 도시였다.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그것은 곧 앞으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준 곳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바로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어려움을 이겨내면 반드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해주었다. 해외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했지만 인천은 내가 늘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 생각했다.

내가 성장한 곳,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해 준 곳 바로 모유 같은 곳이 인천이다.

-30년 만에 인천에 다시 돌아와 인천발전연구원장을 맡았다. 소감은 어떠했나?

▲인천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야말로 ‘적막’, ‘황량’, ‘쓸쓸함’ 이런 단어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인천은 그동안 출혈만 강요당했을 뿐 어느 누구도 고통의 대가를 주려하지 않았다. 결국 인천은 제 자식들을 키우는 데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인천발전연구원장을 맡은 후 첫 프로젝트로 ‘인천재발견’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항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인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도시재생’이다. 지금은 전국 어디에서도 사용되는 ‘도시재생’이라는 말은 바로 인천이 시작이다.

처음에는 학술적인 접근이 어렵고 말 자체도 생소하고 보니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원들하고 끊임없이 토의 협의 등을 거쳐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인천 출신인 내가 인천에 주고 싶었던 선물이었다. 더 이상 인천을 남에게 퍼주기만 하는 도시가 아닌 역사 문화를 새로운 에너지로 활용해 사람들이 모이는 미래도시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단순 확산 및 팽창이라는 개념으로 인천을 볼 것이 아니라 인천 내부로 눈을 높여 도시의 질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도시는 생명체를 가진 유기체로 개발이 아닌 재생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 의미는 너무 중요하다. 개인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면 바로 인천의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도시는 국가보다 오래 기억된다. 인천이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시재생’ 이후 시작한 것은 바로 ‘산업재생’을 연구했다. 한국 공업화 1세대 도시인 인천은 여전히 울산 다음으로 광역시로는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제조업 비중이 높다. 도시의 얼굴은 경제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바뀐다. 인천은 제조업의 부활 및 재건 없이 불가능한 만큼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천발전연구원장 이후 지역 최고 경제단체인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맡았다. 상의 부회장으로 바라본 인천은 또 어떻게 다른가? 또 주요 과제는 무엇인가?

▲세계 유명 도시들이 기업과 도시를 한 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인천은 그 반대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도시 홍보물에는 반드시 ‘우리 도시에 어떤 기업이 있는가’하는 것을 알린다. 어느 기업이 그 도시에 있느냐에 따라 도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큰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처음 인천상의에서 일하게 됐을 때 기업과 도시 간 단절이 느껴졌다. 이를 해결 하는 것이 나의 첫번째 과제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오고 있다.

또 시대에 맞는 상의 역할은 다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의는 지역 경제에서 실물경제 센터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소나 통계청, 다른 기관들로 역할이 위임되면서 기능과 권한이 분산됐다.

다행이도 200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지방분권화로 다시 상의가 주목받는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의 상의는 인천에서 역할이 더 많아졌고 기회 역시 많아졌다. 인천상의는 인천이라는 도시를 재생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주요 기둥 가운데 하나다. 기업과 지역의 일체화, 사회와 기업의 일체화 등 인천상의가 단절된 지역의 튼튼한 다리가 돼 주어야 한다.

-인천에 다시 돌아 온 이후 수년간의 시간이 흘렀다. 현재 인천이 당시 인천과 달라진 것이 있나.

▲인천이란 이름이 경제자유구역, 인천대교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로 전국에서 회자되고 있다. 오랫동안 빛에 가려져 있던 인천이 드디어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인천은 21세기 한국이 가야할 필요조건들을 모두 갖췄다. 100년 전 개항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였듯 지금은 공항, 도로, 철도 등으로 또 한번 위대한 개항을 준비 중이다. 배후에는 한국 최대의 수도권 시장 등 충분조건도 갖추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조건들을 어떻게 도시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저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천에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천은 더 이상 퍼줄 것이 아니라 우리 먼저 잘 살자는 생각으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정부 역시 인천이 ‘발전소’ 역할을 하지 못하면 한국의 동력이 꺼질 수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인천의 위상과 역할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앞으로 인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파리나 런던 시민들은 아프리카 오지는 찾아가면서 왜 인천을 찾아오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이 답은 바로 인천을 개성 넘치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천을 뉴욕 혹은 상하이를 표본으로 따라가자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는 이상적인 도시가 아니지만 그 곳만의 개성을 직접 즐기려는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되는 인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천이 개성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인천은 수수께끼 도시다. 인천의 수수께끼가 풀릴 때 대한민국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또 지금의 인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내가 인천에서 꿈과 희망을 배웠듯 오늘의 아이들에게도 인천이 그런 곳이기를 바란다.정리=이은경기자 lotto@i-today.co.kr 사진=김성중 기자 jung@i-today.co.kr

이인석 부회장은

▲1943년 4월 황해도 연백 출생

학 력

▲인천 제물포고, 서울대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학 수료

경 력

▲1973~1977년 3월 코트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베를린 사무소장.

▲1980년 10월~1983년 6월 스위스 취리히 무역관장

▲1985년 11월~1989년 7월 함부르크 무역관장

▲1990년 10월~1993년 9월 동베를린 무역관장

▲1993년 10월~1994년 11월 북방실장

▲1994년 12월~1995년 9월 중국실장

▲1995년 10월~1998년 1월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장

▲1998년 2월~2000년 8월 청와대대통령비서실 산업통신과학비서관, 건설교통비서관

▲2000년 8월~2005년 7월 인천발전연구원장

▲2005년 3월~2005년 8월 인천대 동북아통상대 겸임교수

▲2005년 9월~현재 인천대 동북아통상대 석좌교수

2006년 3월~현재 인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저서 및 논문

▲‘하버마스의 사회인식론’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학생운동’

▲‘죽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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