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일이면 공촌천에 대한 생태하천 공사가 마무리된다. 2002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여정이 끝나는 것이다.

2004년 12월 장수천 1단계 준공을 시작으로 나진포천(2008.7), 굴포천(2008.10), 승기천(2009.6)에 이어 공촌천을 마무리하면 도심지 내의 하천복원은 일단 끝난다.

‘자연형이다, 아니다’라는 비판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준공했더라도 유지용수를 공급해야 하고, 하천을 관리해야 한다. 여전히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연을 복원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는 평범한 교훈을 예서 찾을 수 있겠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사항은 이 사업은 인천에서 처음으로 ‘거버넌스체제’에 따라 추진됐다는 것이다. 행정과 시민이 끝까지 함께 하는 등 인천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이는 타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번듯한 강 하나 없지만 ‘하천의 모델을 인천에서 찾자’며 인천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인천시 물관리과 임원걸 과장과 하천살리기추진단 최혜자 사무국장을 만나봤다.




(인천시가 민·관협력으로 추진하고 있는 자연형하천 조성사업이 공촌천 준공을 끝내면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인천의 도심지역에서 장수천, 나진포천, 굴포천, 승기천, 공촌천 등 5개 하천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사진은 경서대로교 하류방향에서 본 공촌천 전경))

“60%이상 복원… 이제부터 시작”

임원걸 인천시 물관리과 과장

“자연형 하천의 완성이요?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각 하천을 준공할 때마다 늘 임원걸 과장이 있었다. 2007년 1월에 물관리과에 온 임 과장은 하천이 전국적인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는 점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행정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업기간 연장으로 이어진 숱한 협의로 인해 피곤했을 터인데 되레 반겼다.

“민의 입장에서 구상과 설계를 하고 관에서 받아들이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시민의 참여와 다양한 의견 때문에 결론을 낼 때 고심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서울의 청계천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만 갔다. 하천별로 주민들의 네트워크 조직이 생겼고, 환경단체도 늘 관심을 표명했다.

행정과의 이견조정도 힘들었다. 일부 지자체는 준공되기가 무섭게 구조물 설치를 추진하다 마찰을 빚었고, 종합건설본부도 치수 쪽에 치우치는 등 관점의 차이도 있었다. 사회적 합의란 절차를 거쳤건만 이를 행정이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피곤할 때도 있었고, 비효율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사업만큼은 시민의 뜻대로 가는 게 우선이었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게 임 과장의 속내다.

이같은 과정을 겪은 덕에 세계물포럼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타 시·도에서도 계속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 곳이 바로 인천이란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준공하고도 한강원수 공급이 제대로 안 될 때는 그 역시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자칫 물고기 폐사라도 야기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슴을 졸였다. 홍수라도 나면 호안이 유실될지도 큰 걱정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하수구가 돼 있던 하천을 일단 60∼70% 정도 정상으로 되돌렸을 뿐입니다”며 조급해하지 말자고 했다. 자정작용과 수질개선 등 사후관리가 절체절명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환경정책과에서 한 징매이고개 복원사업을 거론한 임 과장은 “녹지축을 연결했다고 이내 사라졌던 동식물이 나타나지 않듯이 하천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좋은 물을 공급하고, 집중호우 이후에 청소 등 관리와 철새와 물고기 등의 안전한 서식처 보완 등 과제도 많다는 것이다. 이 역시 행정과 예산의 몫이 아니라 주민의 관심과 참여가 동반될 때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매달 모니터 결과가 나올 때마다 각종 동·식물이 보고되는 것이 큰 보람이라고 했다.

그는 하천 복원이 공원 조성사업에 비해 예산이 적게 드는데 그 효과는 배 이상이라고 자신감도 표했다. 5개 하천복원공사는 인천의 대표적 공원 가운데 하나인 중앙공원(폭 50∼100m, 길이 4㎞)의 5배 이상 정도 공간이 공원화됐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2천억원 정도의 돈이 들었는데, 공원을 만들 때 보상비를 생각하면 하천 조성은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고 단언했다. 속물적 표현을 빌면 하천 변의 아파트값이 급상승해 기뻐하는 주민들을 볼 때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하면된다 믿음으로 의미있는 소통”

최혜자 하천살리기추진단 사무국장

“승기천이 하천이라고요?”

하천 일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최혜자 사무국장은 승기천을 이렇게 생각했다. 시민단체(경실련) 활동을 시작할 때 그에게 처음 맡겨진 업무가 이 하천을 살리기였다고 한다. 이때가 2002년 4월 무렵이다.

냄새도 지독했고,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해 10월 인천의제 물생태분과 간사를 맡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승기천을 청소하러 다녔던 것. 그러면서 그는 전문가들에게 자료를 의뢰하면서 공부를 했고, 교육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을 쌓아갔다.

“2003년 물의 날 행사에서 안상수 시장이 허리장화를 신고 직접 승기천에 청소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이후 안 시장은 승기천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러면서 하천살리기 논의가 시작됐고, 도심하천복원에 대한 종합계획이 나왔다.

통상적으로 시의 계획에 대해 시민사회 진영에선 반대가 우세했지만 하천은 달랐다. 당시 경실련 활동가였던 최혜자 사무국장은 ‘긍정적 측면이 많았다’는 입장이었다.

의제 물생태분과에서 숱하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행정과 전문가 영역과 소통을 하던 터였기 때문에 하천에 목이 말랐다. “문제제기를 하지 말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라”는 권유를 받은 그는 하천살리기추진단을 발족할 당시 팀장으로 몸담게 됐다.

당시 시민사회 일각에선 ‘잘 해야 본전인데 뭐 하러 들어갔느냐’ ‘공무원 공적 쌓는데 들러리 설 일 있느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일단 처음으로 민관파트너십을 표방한 만큼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하나로 하천에 몰두했다.

“이런 사례가 없었고, 어쨌든 지난 7년 동안 많이 안정화됐죠.”

최혜자 사무국장은 하천별 네트워크가 구성될 정도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가면서 전문성을 쌓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적 방식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의견수렴하는 데 한도 끝도 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설계할 때도 주민들의 의견을 모았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여론을 물었다. 회의와 각종 설명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진행했다.

그는 시민사회로부터 ‘관변인사가 됐다’, 행정 측으로부터는 ‘시민단체 출신이라 그렇구나’라는 비난을 들을 때도 있지만 거버넌스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논의와 토론을 통해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바로 거버넌스의 답안이라는 결론이다. 하천에서 시작된 물에 대한 관심은 빗물, 먹는 물, 바다, 해양 쪽으로 확장됐다. 조만간 스리랑카에서 열릴 ‘물과 여성’ 컨퍼런스에서도 승기천 사례를 발표할 예정이다. 여성으로서 하천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점을 비롯해 여성과 환경 등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끝-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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