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1년만에 32개 가맹경기단체 발족, 2년만에 전국체전 6위, 각 구청별 실업선수 채용, 한해 보도자료 600건 발송. ?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모회사로 둔 스포츠그룹이나 타 지역 체육회 얘기가 아니다. 지난 2007년 4월 출범한 인천시장애인체육회의 짧은 연혁들이다. ?

출범 초기 늘상 있는 장애인단체 중 하나쯤으로 생각하던 인천시장애인체육회가 2년반 사이에 타시도가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장애인체육회의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여기엔 너무 적극적이어서 오히려 남들에게 눈총을 받으며 살아온 정의성(66) 사무처장이 있었다.?

“일상에 나와 있는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스포츠를 보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에 있는 장애인들을 밖으로 나오게 유도해 체육활동을 함께하는 사업은 반드시 운동차원에서 전개돼야 합니다.” ?

여섯살 때 다리를 다쳐 신흥초등학교 시절부터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맞대응을 하느라 단골로 벌을 서야 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만큼이나 장애인들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게 그간 장애인들과 함께해온 정처장의 지론이다.?

더욱이 고등학교 시절 3년간의 전인천기독학생연합회 회장직을 시작으로 학원연합회, 웅변협회를 거쳐 각 동창회 일까지 도맡아 오면서 확인한 것은 “남보다 적극적으로 살아야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이다.?

하지만 그토록 믿고 살아온 교훈도 정처장의 일상에 모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에 적을 두던 시절 3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1번의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남들 못지않은 아픔도 맛봤다.?

부인의 피아노학원을 팔아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버텨온 정치인 생활이었지만 정처장은 그 대신 사람을 얻었다고 자평한다. ?

마지막 출마의사에 부인의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그래도 가족만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불출마를 증명하기위해 수십 년 간 적을 둔 남구를 등지고 연수구로 이사하며 정치와는 담을 쌓았다. ?지금 장애인체육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때부터 이어진 인연으로 도움을 준 많은 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털어놓는다.?

최근엔 역도와 사이클 등 가맹경기단체장들이 열과 성을 다하는걸 보며 그 분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정을 버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남모를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지난 2000년 12월9일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를 발족시켜 7년 간 이끌어 오는 과정에서 불거진 일들이 검찰에서 무혐의로 판정난 이후 또 다시 보건복지부 사회복지부정비리센터까지 이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주변으로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재해석을 요청해 놓은 4개월 업무추진비 문제에 보조금 유용설, 심지어 체전 단복에 중국산 신발 시비까지 장애인단체장인 제가 매번 이의를 제기하는 장애인을 상대로 맞대응 할 수 없는 위치 아닙니까.”?

일을 하다보면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고 자신 역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잘못 꺼낸 얘기를 곧바로 단상에서 사과한 적도 있지만 금전문제 만큼은 다르다는게 정처장의 얘기다. ?

이젠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일에서 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해 나가겠다는 정처장은 장애인 한 사람에게 돌아갈 10만원의 장비를 5만원으로 깎아 두 명에게 혜택을 준다면 그것도 전용이라는 법의 틀로 묶어 가로막을 수 있냐고 되묻는다. 이원구기자 jjlwk@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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