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이후 홍상수에게서는 더 이상의 작가적 엣쥐(edge)가 없어졌다고들 했다.

<극장전>이 그랬다. 어디선가 명불허전이란 표현을 썼지만, 오히려 홍상수 본인부터 사람들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하는 심정으로 만든 소품인 것처럼 느껴졌다.

<극장전> 때 홍상수에게서는 와락 매너리즘이 느껴졌다.

세상은 온통 전쟁이다 살육이다, 테러다 학살이다 해서 난린데 홍상수 혼자서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혹은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사이에서 오가는 '사담(私談)'에만 관심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홍상수는 마치 자신만의 소우주에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 새영화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의 화려한 부활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인간 내면의 '소우주'를 통해 인간 세상의 '전체 우주'를 드러내는 변증법적 논리를 유감없이 발휘해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두 쌍의 남녀가 만들어내는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 역시' 홍상수가 늘 관심을 나타내는 지적인 척 하는 사람들의 천박한 스노비즘은 물론 비루한 일상의 카니발을 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해변의 여인'은 궁극적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세상의 풍경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왜 지금의 세상이 이토록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는 사실 인간의 잘못된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 더군다나 그 잘못된 욕망을 끝없는 궤변으로 변명하고 또 변명하고 그래서 늘 거짓에 거짓의 얘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얘기한다.

'해변의 여인'은 영화감독인 중래(김승우)가 후배이자 음악감독인 창욱(김태우)과 서해안 어디쯤에 있는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둘의 여행에 창욱의 여자친구라는 문숙(고현정)이 동행하게 되는데 부지불식간에 눈이 맞은 중래와 문숙은 창욱 몰래 '하룻밤 정사'를 벌인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다.

중래는 전날 밤의 열정과는 달리 문숙을 부담스러워 한다.

떠밀다시피 창욱과 문숙을 떠나 보낸 후 중래는 휴양지에 놀러 온 또 한 명의 여자 선희(송선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이곳으로 되돌아 온 문숙에게 그 현장을 들키게 된다.

영화는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삼각관계에서 시작해 남자 하나 여자 둘의 삼각관계로 종횡무진 오간다.

홍상수의 영화답게 이 모든 인물의 관계는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루나 이틀 밤에 삼각관계가 중첩되기란 여간해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 일상의 삶은 그러한 비현실성이 어김없이 늘 관통하다는 데에 오묘함이 만들어진다.

다만 우리가 그 같은 욕망을 한 꺼풀 두 꺼풀의 위선의 막으로 감추어 내고 있을 뿐이다.

홍상수는 마치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우리들의 저열하고 비굴한 욕망의 속살을 드러내게 한다.

그점에서 홍상수만큼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가 있을까. <해변의 여인>은 세상에 대한 냉소로 가득차 있는 홍상수의 탁월한 식견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중래와 전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한 선희는 그 전날 밤 그와 섹스를 한 여자 문숙과 소주를 마시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세상에서 언니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게 뭐에요?" "나? 나는 집착. 그쪽은?" "전 배신이에요." 집착해도 배신당한 여자와 배신당한 걸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여자. 두 여자는 남자 한 명을 두고 싸우고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서로를 가장 이해할 수 있는 거리에 서있는 셈이다.

부조리 속에 조리가 담겨져 있으며 부조리와 조리는 결국 같은 논리선상에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세상에 진실이 어디 있는가. 세상에 진심이라는 것이 어디서 통용되는가. 세상에 불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세상사가 편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바로 그점을 인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근래에 나온 국내 작품들 가운데 연기자들 모두의 호연이 균질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감독의 얼터 에고(alter-ego)가 분명해 보이는 김승우의 연기를 중심축으로 고현정의 집중과 몰입 연기는 극치에 이른 감을 줄 정도다.

송선미 역시 과거 자신의 전작과는 완벽하게 차별화된 연기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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