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영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지고한 애정으로부터 인간으로까지 파급된 생의 요소이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자연뿐 아니라 이를 표현하고자 그가 선호하는 색채와 공간운용, 그리고 선의 향연에서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반영된 그의 그림들은 치열한 삶의 흔적들 보다는, 고즈넉한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시적 정취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잊고 살아온 고향의 서정에 응축된 정감의 표현이자, 작가 자신에게는 예술을 통해 인간애로 나아가고자 하는 실천적 에너지요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일단 전운영은 그가 포착한 대상, 즉 포구나 시골마을, 또는 남해의 푸른 바다와 요동치는 하늘 등을 거침없이 화면에 담아낸다.

이때 그는 집이나 밭고랑, 들풀 등 개개의 생명체들의 특징을 정확하게 형태와 색채로 재현하면서도, 이러한 대상들은 그의 직관에 의해 요추된 상태로 우리 앞에 제시되어 경직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색채는 자연상태의 그것보다 생기롭고 경관은 수려하다.

언뜻 추상회화의 분방함이 화면의 기조를 이루는가 하면 화면 자체가 물감과 어우러져 평면회화로서의 존재론적 타당성을 확보한다.

각각의 대상들은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듯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어느덧 화면 안에서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어우러져 있다.

그가 담아내는 자연의 피조물들은 윤기 가득한 풍요로움과 고향의 서정이 농축된 정감 있는 리얼리티가 병존한다.

전운영의 그림에서 색채는 다채롭게 구사되나 번잡하지 않고 각각의 대상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빛은 영롱하면서도 의연하고 거친듯하면서도 맑다.

아울러 화면 전체는 전경, 중경, 후경이라는 전통적 원근법의 질서를 따르는 듯하지만, 실은 색채에 의해 규정되는 원근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색채의 화가라 불릴 만큼 나이브(naive)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나이브한 면은 근대 소박파의 그것과는 다르다.

루소나 세라핀과 같은 화가들은 자신이 묘사한 장면의 전체적인 형상 속에서 각각의 부분이 어떠한지 염두에 두고 사물의 시각적인 특징뿐 아니라 개념적 특징, 나아가 세부까지 묘사하고자 집착을 보인 반면에, 전운영은 우선 그림을 잘 그리기도 하지만 자연의 순수한 색채와 리얼리티에 주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모더니즘 회화가 방기(放棄)한 예술의 인간애적 기능을 복원시키고, 자연 안에서 누리는 인간적 삶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상의 재현을 탐닉하거나 대자연의 경이로운 정경에 집착하는 맹목적 자연주의자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용의 전개방식이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그의 그림은 부분적으로 분할할 경우 추상회화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우리가 이 점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대상을 재현할 때 묘사보다는 구축(construction)에 더 비중을 두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이 점은 전운영이 애초에 추상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왔다는 점과 더불어, 구상 또는 추상이라는 종래의 편협한 이분법적 방법론에서 일탈하여 그만의 회화세계를 일구어왔기 때문에 이룬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그림이 자연의 재현을 근간으로 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눈에 거슬리지 않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경모미술평론가· 인천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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