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일본의 광개토왕비 조작설이 사회이슈화 되면서 한국고대사 연구 붐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특집 편성된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백제사 연구자가 일본에는 200여명에 달하는 데 반해 우리는 13명에 불과하다’라는 나레이터의 맨트가 확 와닿았습니다. 그때 결심했어요. ‘백제사를 전공하자’. 역사과목을 많이 좋아했거든요.”

희망대로 인하대 문과대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학원자율화 붐이 한창 일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선배들에게 등 떠밀려 총학생회를 감시하는 의결기구 총대의원 감사위원을 맡게 됐다.

그것이 사단이었다. 감사에 문제가 발생했다.

“총학생회로부터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죠.” 결국 1학년 2학기 초 군입대를 선택한다.

전화위복이 됐다.

복학을 하면서 일찌감치 인생진로를 결정했다.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연구자의 길을 택한 겁니다. 배움을 향한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은 부분도 일정정도 작용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을 하면서 인하대박물관 TA조교 자리를 받았다. 이를 인연으로 1년후 정식 조교로 발령을 받는다.

“지표조사란 걸 처음 나갔어요. 한편으로는 박물관지를 만들었습니다. 박물관학에 점차 관심이 갔습니다. 당시인천에서는 발굴조사 사업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상태였어요. 전공 공부보다 박물관 일에 몰두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학예사 채용 공고가 났다.

동시에 경기도박물관도 학예사를 뽑았다.

“형들하고 의논 끝에 태어난 곳에서 일하자는 결론을 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옆에는 대학원시절부터 함께 공부해온 배성수 학예사가 있었다.

“발령을 받아 가보니 박물관이 아니었습니다. 유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전혀 없는데다 전시는 진열 수준이었어요. 연구 기능도 없고 사회교육은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수준이더군요.”

이대로는 안된다 싶었다.

방법을 찾으러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더니 ‘그 예산, 그 인원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홀대가 돌아왔다.

이번엔 경기도 박물관으로 뛰어갔다.

“초창기부터 박물관을 일궈온 최성근 부장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총체적인 운영과 절차에 대한 일을 많이 배웠습니다.”

유물카드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7개월이 걸렸다.

수동 카메라로 일일이 찍어 사진 자료를 만들었다.

“기성박물관에 와서 모든 유물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얻을 수 없는 기회죠. 당시에는 너무 힘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큰 공부가 됐습니다. 지금까지도 시립박물관 유물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배 학예사와 함께 있어 가능했다고 말한다. 역할을 나눴다.

사회교육과 전시 쪽을 맡았다.

우선 수능이 끝난 학생들을 대상으로 출장 강의를 나갔다.

상륙작전기념관이 인천시내 전체 고교 2년생에게 실시하는 ‘고교생 민주시민교육’에 박물관 탐방코스를 끼워 넣고 교육을 맡았다.

교사반도 모집했다.

교육청과 1년간 협의를 거쳐 수료시 연수학점(3학점)을 딸 수 있도록 했다.

다음은 시민교육이다. 박물관대학을 개강했다.

“120명 정원으로 시작하면서 호응이 저조하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접수 30분만에 마감됐습니다. 분야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를 강사를 초청한 프로그램 덕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기획전시도 내걸었다.

“둘다 일 욕심이 많아요. 남들이 해보는 것은 다 하자 했습니다. 예산이 적어서 전시 규모는 내세울만하지 않지만 시작이 반이잖아요.”

차츰 발굴사업에 관심이 갔다.

학예연구사를 늘려달라고 낸 건의가 받아들여졌다.

“발굴을 하면 유물 구입비도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고학을 전공한 학예사 3명이 왔습니다. 학예실장을 맡으면서 2년동안 발굴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유물 구입에 대한 제도를 개선했지요. 예산도 확보했습니다.”

문제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왔다.

토요일 오후 다른 행사 참석차 송도에 온 부시장이 박물관에 들른 것이다.

“전면적인 증·개축이 시급하며 50억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시장이 지체않고 문광부에 가서 지원신청을 낸겁니다.”

광역시 부시장이 직접 나서서 요청을 하자 문광부에서는 ‘공립박물관을 신축할 경우에 한해 예산지원’이라는 규정을 깨고 12억원 지원안을 기획예산처에 올린다.

결국 3억원이 내려왔다.

“규모는 기대 이하로 작지만 의미는 큽니다. 이를 종자돈으로 시가 박물관 증·개축 예산을 편성한 겁니다.”

입사할 때부터 증·개축에 대한 동선을 그려놓고 있었다.

예정보다 준비과정이 늘어지고 생각지도 않던 면적이 늘어나면서 당초보다 두배에 달하는 예산 증액 어려움을 겪었지만 2년여동안은 박물관 재개관을 위해 올인한 시간들이다.

그런데 개관 4개월을 남겨놓고 송암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발령이 난다.

“선임연구관이다보니 당연히 갈 수 있는 일이지요. 다만 내가 기획한 박물관 개관을 몸담고 있으면서 보고 싶었습니다. ‘개관 다음날이라도 좋다. 그때까지만 이곳에 있게 해달라’ 내심 기원을 많이 했거든요.”

동양제철화학이 송암미술관을 시에 기증했을 당시부터 인수절차에 관여한 그였다.

협약서 작성부터 인수단 구성까지 1년동안 일련의 과정을 진행했다.

나름대로 애정이 있다.

그럼에도 발령에 대한 섭섭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언제까지 속앓이를 할 수만은 없었다.

일중독 증상이 발동한 것이다. 유물카드를 들여다봤다.

10년전 시점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이 보였다.

“유물카드를 다시 만들면서 의외의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전공자라면 알 수 있지만 일반인 수준에서 모를 고미술 작품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거다 싶더군요. 회화중심 미술관으로 가면 특별하다는 겁니다.”

긴장감이 다시 생겼다.

미술관 전시는 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이 그를 뜨겁게 만들었다.

“이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할 일들이 보여요.”

“시립박물관 재개관 시점에 맞춰 목표로 삼은 것이 시 산하박물관인 송암미술관과 검단 선사박물관 두곳부터 분관체제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시립박물관을 정점으로 구·군이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구축입니다.”

시립박물관이 통합적 관리 운용권을 갖는다면 각각의 박물관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과 기획전시가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시가 박물관 건립 등 행정집행 과정에서 철저하게 시립박물관을 배제한 것이 문제라고 푼다.

“시립박물관 위상이 커져야 합니다. 경기도내 38개 박물관들이 협의체를 구성한 것은 도립박물관이 중심에서 역할을 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시립이 도약할 수 있는 시점입니다. 물론 제 역할은 송암미술관을 특성있는 박물관으로 만들어내는 일이죠.”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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