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주몽’의 인기와 더불어, ‘소서노(召西奴)’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특히 인천(미추홀)의 한 시민단체는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서 ‘소서노’를 기념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할 요량이다.

소서노의 실체를 찾고 재평가하는 연구활동을 벌이고, 기념관 건립까지 벌일 태세다. <본보 18일자 1면 보도>

‘문학산 역사공원 사업’을 맡은 인천관광공사도 이에 적극 동참할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소서노’는 과연 어떤 여인일까.

▲‘소서노’(召西奴)=‘소서노’는 역사서에 실명이 거론된 최고(最古)의 여인이다.

비류를 백제의 시조로 본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전승에 소서노의 실명이 거론되는데, 이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자 우태(優台)와 결혼해 그 사이에 큰 아들 비류와 둘째 아들 온조를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백제본기 온조전승에선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나와 간 졸본부여에서, 졸본부여 왕의 둘째딸과 결혼했다는 기록 뿐, 소서노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또 한 설(說)은 주몽이 졸본에 와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취(娶)해 두 아들을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최초의 여성 지도자인가

드라마 주몽은 ‘소서노’(한혜진 분)를 시대를 내다보는 총명함을 지녔으나 여자였기에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주몽·송일국 분)을 정상에 올려놓은 가장 든든하고 지혜로운 조력자로 그리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왕으로 높이 평가한다.

비류전승으로 돌아가보면, 소서노는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다, 북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과 만난다.

소서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때 가재(家財)를 털어 도왔고, 주몽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했지만, 주몽은 첫째부인 예씨(드라마 상 부영·임소정 분) 소생의 아들 유유(孺留·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에 책봉한다.

주몽이 죽자 비류는 “한 갓 여기에 있어 혹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라며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갈 것을 제안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삼국사기대로라면, 비류가 어머니 소서노와 동생 온조를 설득해 남쪽으로 향했고, 그렇게 도착한 것이 미추홀, 바로 인천이다.

▲매소홀(買召忽)·미추홀(彌鄒忽)=소서노학회(회장·차옥덕)는 고구려때 인천의 지명인 매소홀을 ‘소서노(召)가 산(買) 땅(忽)’으로 해석하고 있다.

조선상고사(신채호·1931년 조선일보 연재)에 소서노를 ‘백제를 세운 여대왕’으로 묘사하고, ‘마한의 땅을 사 백제를 세웠다’고 한데 따른 해석이다.

음운연구사 동의대 최남희(국문과) 교수는 지난해 11월 인천학연구원이 주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미추홀은 고구려 때 ‘미소골(mi-su-kurV)’이라 발음했으며, 뜻은 ‘물이 있는 성(城)’ 또는 ‘물로 둘러싸인 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 교수는 “고구려어의 발음규칙에서 인천을 나타낸 ‘매소홀(買召忽)’, ‘미추홀(彌鄒忽)’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을 뿐 의미상 별 차이가 없는 음차자(音借字)로 쓰였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천의 옛 지명이 물과 관련돼 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학계의 정설이다.

삼국사기 온조전승에는 온조가 마한땅을 침범하자, 마한의 왕이 “내가 동북 1백리의 땅을 떼어 안거케 하였으니(하략)”라고 기록돼 있다.

▲왜 소서노일까=지난해 인천경제자유구청의 행정동 명칭 논란 때 거론된 것 중 하나가 ‘비류동’이었다.

삼국사기 온전전승대로라면 비류는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한 지도자다.

이런 이유로 ‘비류동’은 탈락했다.

최근 일부 시민단체가 소서노를 새롭게 조명하고, 기념사업을 벌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인천의 상징 인물로, 문헌사적으로 기록된 최고의 여성이자 최초의 여성 지도자로서, 실패한 지도자 비류를 대체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내 학계는 이 같은 움직임을 경계하는 눈치다.

드라마가 그린 소서노는 상상력에 따른 결과일 뿐, 소서노를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 학예실장은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를 세웠다는 일부 학계와 시민단체의 주장은 역사를 확대 해석한 결과다”라고 지적했다.

인천시립송암미술관 김상열 학예연구실장도 “소서노와 관련해 역사서나 기록을 살피는 등 문헌사적인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며 “다만 신화나 설화 등에 나타난 소서노의 흔적을 찾는 길인데 이 또한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희기자 juhee@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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