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따라 일어난 독립운동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50여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일본, 미주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일부에서는 우리의 광복이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부산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광복은 300만여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5만여명이 순국하는 희생을 치른 대가인 것이다.

광복회는 1913년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1916년에는 광복단이라고 개칭하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민족이 거족적으로 봉기해서 값진 피를 흘린 3.1운동은 세계로부터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이루게 하였고, 강력한 독립투쟁 정신으로 계속 이어졌으며, 일제의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책으로 바꾸게 하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 중 괄목한 만한 활동을 낸 대표적인 단체인 의열단은 잔악한 일제에 폭력으로 맞서 대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920년 6월 밀양경찰서 폭파를 비롯 부산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 폭파, 월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사살 미수, 1923년에는 김지섭 의사가 토오쿄의 천황거소에까지 가서 폭탄을 투척하여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의열단 투쟁은 1930년대에 이르러 김구의 비밀결사 애국단으로 이어졌다.

일제가 의병에 대해 1909년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감행한 후 더 이상 국내에서 투쟁이 불가능해지자 의병들과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였는데 3·1운동 이후 만주에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박장호가 이끄는 대한독립단, 구춘선의 대한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상룡의 서로군정서 등 70여개나 되는 많은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1920년대 중반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은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로 통합·정비되었는데 3부는 각기 군사부를 설정하여 독립군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으로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어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독립군 간부 대부분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다.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국무위원들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비록 ‘임시’라는 관용어가 붙긴 하였지만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봉창·윤봉길 양대 의거후 중국정부의 협조하에 낙양군관학교에 특별반을 설치하고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1939년 11월 서안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중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임시정부는 26년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의 감격을 맞게 되었다.

우리 선열은 이처럼 혼신을 다해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내나라 내민족을 지켜주셨건만, 지금의 우리는 고개를 들어 감히 선열앞에 떳떳할 수가 없다.

광복이후 이념으로 국가가 갈라져 반세기를 넘기고, 다시금 제2의 광복인 조국통일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사회내부에서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층간 갈등과 대립이 커져만 가고 있으니 참으로 선열의 숭고한 희생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제61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민족의 제단에 일신을 바쳐 조국광복의 위업을 성취하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을 우리가 당면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과제를 이루는 구심점으로 삼아 21세기 동북아시대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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